[인터뷰] 시니어 모델 최순화씨
결혼·육아에 접었던 꿈
60년 만에 인생 2막 열어
발품 팔아 찾은 모델 학원서
5년 간 워킹·포즈 배워
늙어보일까 감췄던 은발은
트레이트 마크
“할머니 최고” 응원에
세계 무대도 꿈 꿔
시니어 모델 활동 모습이
다른 이에게 용기 주길
“소녀적 꿈이 칠십 대에 와서 이렇게 이뤄지나.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굉장히 기뻤고, 어깨에 힘도 들어갔어요.”
77세 최순화씨는 데뷔 2년 차 시니어 모델이다. 늙어보일까 감추고 싶었던 은발은 이제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지난해 ‘헤라 서울패션위크 가을·겨울 시즌’ 디자이너 ‘키미제이’의 무대를 통해 시니어 모델 최초로 메인 모델이 됐다. 최씨는 즐거운 표정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큰 설렘과 긴장을 느낀 순간이었다. “올라가기 전에는 실수하면 어쩌나 싶어 가슴이 많이 두근거렸어요. 내려오고 나선 ‘이때 잘 못 했네’ 하는 아쉬움도 들었고요. 나를 돋보이게 하려 고민했어요.”
최씨의 어린 시절 꿈은 모델이었다. 아버지가 사 오신 잡지에 등장하는 모델들을 동경했고 옷에 관심이 많아 어깨너머로 재봉질로 옷을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170cm의 늘씬한 키에 주변에서도 모델을 권했지만 ‘모델 하고 싶다’는 말 한 마디 입 밖에 내보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꿈 꾸는 일조차 자연스레 접었다. 60년이 흐른 어느 날, ‘모델 해보라’는 지인의 권유는 다시 그를 흔들었다.
“지인이 실버 모델이라는 게 있는데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처음 알았어요. 나이든 사람도 모델을 할 수 있다는 걸요.”
처음에는 웃어 넘겼지만 곧 금세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칠순 넘은 할머니가 무슨 모델이냐’는 생각도 잠시,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느냐는 마음이 불쑥 솟아 올랐다. “내가 하고 싶던 거, 할 수 있으면 지금 해야지’ 싶었죠.”
아버지가 사 오신 잡지에서 예쁜 옷을 입고 사진 찍은 모델을 동경했지요. 집에 붉은 벨벳 천이 있었는데, 어머니 어깨너머로 배운 재봉질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장갑도 만들어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했어요. 하지만 그땐 부모님께 말 한마디 꺼내보지 못했습니다.”
모델 일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놔
그러나 육십 대 후반의 최씨가 모델 학원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스마트폰도 사용할 줄 모르고, 모델 학원 찾는다고 말하긴 부끄러워서 한동안 찾아보질 못했어요. 우연히 TV에서 모델 활동하는 두 노인을 보고 결심이 섰죠. 해보자. 수소문해서 모델 학원을 찾아갔어요.”
올해로 5년 차, 일주일에 한 번씩 듣는 모델 수업은 최씨 삶의 큰 원동력이다.
“나이가 들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한다는 건 굉장히 즐거워요. 다음번에는 어떤 옷을 입고, 머리를 어떻게 할까. 쇼할 때는 어떤 포즈를 취할까. 집에서도, 전철을 타도 온종일 이런 생각으로 꽉 차 있어요.”
동료들과 함께 시장에 가서 옷과 액세서리를 걸쳐보는 일도 최씨에게 소소한 재미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 일상사진과 글을 올리는 새로운 취미도 생겼다.
“‘인스타’(@soonhwa01) 너무 재밌어요. 직접 하는 거예요. 제가 올리면 학원 ‘쌤’들이 글을 써주기도 하고, 멋지다는 메시지도 자주 와요”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지금은 ‘하트’, ‘웃음’, ‘장미’ 등 자주 쓰는 이모티콘도 활용하며 원활히 소통한다.
최씨는 원래도 자세가 바른 편이었지만 더 좋아지고, 건강해졌다고 했다.
“제 별명이 ‘깁스’예요. 너무 똑발라서. 그런데 학원에 와서 보니까 어깨가 약간 굽은 거예요. 수업 들으면서 일자로 바로잡았죠. 전철 타면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고 어찌 그렇게 꼿꼿한지 물어봐요.”
가족들도 최씨의 활동을 ‘멋지다’며 응원한다.
“딸이 ‘엄마는 모델 했으면 잘했을 텐데,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고 했거든요. 지금은 너무 좋아하고 응원해줘요. 손자들도 ‘우리 할머니 최고예요’ 하죠.”
더 많은 무대에 설 수 있길
하지만 최씨는 지금까지의 활동으로 수입을 얻지는 못했다. “지금은 시니어 모델이 많은데 설 자리가 없어요. 선다 해도 수입은 거의 없고요. 디자이너 선생님들이 아직 거기까지는 다 못 하나 봐요.”
시니어 모델의 활동이 아직은 주로 자아실현의 개념으로 여겨지는 것도 한 이유다. “그래도 저랑 칠두씨가 서울패션위크에 섰으니 앞으로는 좀 더 열리겠죠. 요즘엔 시니어의 모델·연기 활동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에이전시도 생기고 있어요. 그런 곳에선 런웨이에 나갈 때 급여를 주죠.”
최씨와 함께 런웨이에 오른 남성 시니어 모델 김칠두씨도 최근 주목받고 있다. 최씨는 다른 시니어들도 자신을 보고 희망을 얻길 바란다고 말했다. “각자의 재능을 살렸으면 좋겠어요. 한 번은 학원에 60대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머리 하얗게 센 저를 보더니 ‘이 분 보니까 용기가 나네. 해 봐야겠다’고 갔는데 어찌 됐는지 몰라요. 용기가 안 나서 못 하는 사람은 나 봐요. 나 보면 얼마든지 용기가 나지.”
최씨는 앞으로도 모델 활동을 계속할 예정이다. 연기에도 도전해보고, 세계무대에 한국 시니어 최초로 나가고 싶다는 새로운 꿈도 생겼다.
“잠깐 드라마에 두 컷 정도 지나가는 것도 해보고 싶고, 외국에 갈 기회가 있으면 한국 시니어 처음으로 나가보고 싶어요. 한국에도 나 같은 사람이 있다. 당신네만 있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