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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원기 기자>

몇 년 전 아이들의 사회교과는 지역교과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 고장의 생활, 강남구·서초구>라는 아이가 받아 온 지역화 사회 교과서를 보는 순간, ‘고민의 공명(共鳴)은 이렇게 현실로 창조되는구나!’라는 생각과 더불어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감동은 잠시, 두 주째 주말마다 동네를 탐사하고 아이의 지도 그려주기 숙제를 하면서 감동의 여흥은 깡그리 사라지고 새 술을 헌 포대에 담으려는 이 교육이 어디로 갈 건지 난감하다는 생각만 든다. 교과서는 ‘1. 학교 주변의 모습’이라는 장으로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동네 산꼭대기에 올라 자기 고장을 두루 살펴본 다음 학교 주변을 네 방향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림지도를 그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의 학교 수업에서 이 모든 과정은 생략된 채, ‘부모와 함께 지도 그려오기’라는 숙제로 떨어졌다. 화는 나지만, 교사 혼자서 아이들의 안전을 무시한 채 교과서대로 자기들끼리 조별로 동서남북 탐사하라고 내보낼 수 없는 게 현실임을 숙지하니, 이렇게 해서라도 진도를 나갈 수밖에 없는 교사를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감당 못할 과제 부모에게 떠넘겨서야

첫 아이를 기르며 가혹한 부모 숙제를 몇 번 겪었던 나는 오히려 밤 11시, 12시까지 숙제를 하지 않아도 되게 이런 숙제를 주말에 내준 것에 대해 ‘그래도 부모를 배려하는 고마운 교사네’라는 생각까지 든다. 7차 교육과정이 현장 체험, 실험, 토론 위주로 짜인 것은 창의적 인간을 요구하는 정보화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교육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새로운 내용을 담아야 할 교실과 학교의 틀은 주입식 교육 시대의 것 그대로이니, 새로운 내용은 그림의 떡이고 부모숙제가 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부모도 새로운 내용을 담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새로운 틀은 아니라는 데 있다. 우선 맞벌이 부모의 사정은 어떤가? 주말쯤 되면, 쉬거나 놀러 가는 거 외에는 뭔가 뜻 있는 주말 프로그램을 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중에는 전력투구를 다 해야만 도태되지 않는 게 부모들의 사정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부모들한테 주말에 애를 끌고 나가 학교 대신 동네 탐사를 하고 지도를 그려오라니! ‘학교가 할 일은 학교가 좀 하지, 정말 팀웍 안 맞아 못살겠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든다.

엄마 아이 모두 사교육 대상?

일부 전업주부의 사정은 더러 나을 수 있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아직 잔손이 많이 가는 동생이 있거나 연년생이나 두세 해 터울의 형제를 둔 어머니가 상당한 집중과 시간투자를 요하는 한 아이의 숙제에 매달린다는 것도 한마디로 불가능이다.

마지막으로 주입식 세대인 부모들에게 체험학습 위주의 교육과정은 경험해 보지 않은 숙제를 봐준다는 것 자체만으로 고학력 부모들에게도 부담스럽다. 특히 40대, 내 세대는 대졸이 7%밖에 안 되고 과반수가 그들의 청소년기를 학생이 아닌 근로자나 여타의 직업인으로 보낸 세대이다. 이런 부모들에게 교대나 사범대를 나온 전문가 교사가 감당하지 못하는 교과과정을 떠넘긴다는 것은 폭력과 다를 바 없는 게 아닌가?

이런 사정에 대한 부모들의 적응전략은 다양하다. 한 부류가 나같이 고지식한 부모인데, 화는 나지만 ‘그래도 숙제는 기본인데 성실히 해가야지’ 하는 파이다. 이런 부모의 아이는 숙제를 잘 해왔다고 선생님께 칭찬을 받는 부류인데 한 반에 많아야 대여섯 정도이다.

그런데 부모의 이 성실성이 한 발 더 나아갈 때는 사교육과 엮어진다. 세상에! 사교육 시장은 아래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어느 새 숙제가 장사가 된다는 걸 간파하고 부업 삼아 돈벌면서 애들을 잘 가르칠 수 있다는 명분으로 어머니들을 꿰차고 있었다.

학습지 출판사의 책 판매원이 이런 경우인데, 이들은 돈벌이보다는 자기 자녀의 학습 지원에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다. 정보는 회사가 판매하는 교재와 이 교재가 학교 숙제나 공부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강의를 의미한다.

또한 선배 판매원이면서 먼저 아이를 기른 어머니 강사의 ‘자녀 교육 (대입) 성공담’도 중요한 정보가 된다.

그러나 사교육 자본이 교육이라는 어머니들의 생활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이 빈틈없어 보이는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시장인가는 의문이다. 자기 주변의 어머니들을 관찰한 ㄱ씨에 의하면 어머니들은 출판사의 영업사원이 되기 위해 몇백 만원 어치의 전집을 구매하고 교육을 받으며 정보를 얻으나 계속해서 판매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많은 경우 판매원 생활은 지속되지 못하며, 자기 구매로 그치거나 겨우 한두 건 판매하고 출판사가 제공하는 교육을 어느 정도 받고 나서 판매원을 끝내게 된다.

ㄱ씨가 보기에 교재 판매는 이같이 몇백 만원 어치 교재를 구입해주는, 정상적 판매원이라 보기 힘든 단명한 외판원 어머니들이 신규로 계속해서 가입했다 나가는 순환을 통해 명맥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렇게 사교육에 가서 배워가면서까지 극진하게 아이 숙제를 봐주는 부모는 소수이다. 체험의 의미를 살려 단체의 체험교육 프로그램에 아이와 함께 참여하거나 박물관을 찾거나 여행을 가는 또 다른 소수의 부모를 제외하고 대다수 부모들은 학교 숙제는 대충 해 보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사교육에 맡겨버리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이 풍속도는 다음 호부터 하나 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김정희/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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