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 원작·박혜선 연출의 연극 ‘자기 앞의 생’

연극 '자기 앞의 생'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 '자기 앞의 생' 중 한 장면. ⓒ강일중

로자는 70줄을 바라보는 늙은 창녀. 젊은 시절부터 35년간 ‘엉덩이’를 내어 주는 생활을 해 왔다. 유대계 폴란드인인 그는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이가 된 이래 프랑스 파리의 허름한 아파트에 기거하면서 자기 핏줄이 아닌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젊은 창녀들의 자식들이다. 10대 소년 모모도 그중의 한 명. 오래전 죽은 창녀의 아들로 세 살 때 로자에게 맡겨져 양육된 아랍계 어린이다. 소년은 남의 물건을 슬쩍하기도 하는 문제아 같기도 하다. 현재 로자가 키우는 유일한 아이다.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려진 연극 ‘자기 앞의 생’은 인종과 종교와 세대를 초월해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사회적 약자들이며, 버림받은 영혼들이지만 작가는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는다.

극의 공간은 파리 빈민가의 엘리베이터 없는 7층짜리 아파트 꼭대기 층. 60대 후반의 로자가 오르내리기는 그의 삶처럼 힘든 곳이다. 극은 대체로 잔잔하게 흐른다. 극적인 사건이랄 게 거의 없다. 로자와 모모 사이의 대화는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같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나 음식에 관한 이야기, 모모가 다니는 학교에서 생긴 일, 서로 다른 인종과 종교 또는 언어에 대한 궁금증, 로자가 어른으로서 모모에게 하는 꾸중이나 조언, 모모가 로자에게 부리는 투정, 로자의 과거 회상 같은 것들이다. 둘은 이러한 소소한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기쁨을 줌으로써 각박하고 외로운 삶의 활력을 얻는다. 이 과정에 종종 모모가 일종의 화자처럼 객석을 향해 말하는 내면의 소리가 방백처럼 끼어든다.

연극 '자기 앞의 생'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 '자기 앞의 생' 중 한 장면. ⓒ강일중

이들의 자질구레한 대사와 이야기의 진행 속에서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 같은 현대사의 아픈 상처가 들춰지고, 안락사·인종차별·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 등 현대사회의 민감한 이슈들이 문득문득 스치듯 지나간다는 점이 흥미롭다. 둘의 대화에서는 이와 함께 인간이 살아가면서 잊지 말아야 할 평범한 진리가 슬쩍슬쩍 내비친다.

로자는 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 파리에서 그 집단 수용소로 끌려갈 때의 공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트라우마로 아파트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는 경기를 일으킨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박해받고 버려진 채 힘들게 살아가는 '밑바닥 사람'들이 사랑과 박애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작품이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로자는 자신이 유대인이며 여호와를 믿지만 모슬렘인 모모는 물론 그 전에 맡았던 흑인 소녀 등 아이들이 각자의 종교와 인종의 전통에 맞게 살아가며 세상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연극 '자기 앞의 생'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 '자기 앞의 생' 중 한 장면. ⓒ강일중

무대에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모모가 종종 언급하는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에게 코란과 신의 사랑을 가르쳐 준 사람이다. 빈민가를 돌아다니며 양탄자를 파는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에게 "사람은 사랑할 누군가 없이는 살 수 없다."라는 말을 들려준다. 로사를 비롯한 가난한 집 환자들을 왕진 치료하는 카츠 의사 역시 인종이나 종교에 대한 편견 없이 의사의 직분을 다 한다. 로사는 자신이 창녀 생활을 한 것에 대해서조차 당당함을 갖고 있다. 그는 모모에게 얘기한다. “네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주면 그 사람들이 네게 되돌려주는 거야. … 난 내 직업으로 남들을 기쁘게 해 줬지. 기쁘게 해 줬어…” 이야기 진행과정의 이런 대사들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렇듯 로자와 모모로 대변되는 기층민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박애와 희생과 관용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작품의 큰 매력이다. 연극에는 이들과 대비되는 인물로서 무조건 순혈과 자신의 종교만을 고집하고, 돈 때문에 아내까지 살해하는 모모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로자와 모모의 대화 속에는 한국 무대의 언어로 번역하기가 그리 만만치 않은 말의 유희나 유대인(교)과 모슬렘의 일상적인 표현들이 적지 않다. 작품에서 관객의 웃음을 자극하는 중요한 요소다.

연극 '자기 앞의 생'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 '자기 앞의 생' 중 한 장면. ⓒ강일중

작품 자체에 특별한 사건이 없다고는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보이는 모모의 행동은 극적이다. 그는 뇌경색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다 의식을 잃어가는 로자 아줌마를 생전의 희망대로 식물인간처럼 병원에서 목숨을 연장하는 대신 지하실의 자신 옆에서 평화롭게 죽도록 한다.

늙은 창녀 로자 역에 양희경·이수미 두 배우가 더블캐스팅된 것이 돋보였다. 그 외 모모 역의 오정택 배우를 비롯한 출연진이 고루 좋은 펼친다.

공연은 명동예술극장에서 오는 23일까지.

연극 '자기 앞의 생'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 '자기 앞의 생' 중 한 장면. ⓒ강일중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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