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서울 보신각서 임신중단 합법화 시위
익명 여성 모인 비웨이브, 19번째 집회 열어
4월 헌재 낙태죄 위헌 판결 앞두고 총력
“낙태죄는 가부장제 존속 위한 동력원…
여성 해방 위해 낙태죄 폐지는 필수”

대표 대신 자발적 ‘총대’가 집회 진행
남성은 배제, ‘생물학적 여성’만 참여
검은 옷·마스크·선글라스 여성들
무대서 구호 선창 위해 줄 서기도

 

3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검은 옷을 입은 여성 3000명(주최 측 추산)이 “여자는 인간이다, 내가 바로 생명이다”라고 외치며 헌법재판소를 향해 ‘낙태죄 위헌’을 결정하라고 촉구했다. ©이하나 기자
3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검은 옷을 입은 여성 3000명(주최 측 추산)이 “여자는 인간이다, 내가 바로 생명이다”라고 외치며 헌법재판소를 향해 ‘낙태죄 위헌’을 결정하라고 촉구했다. ©이하나 기자

“여자는 인간이다” “내가 바로 생명이다”

서울 도심서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수천명의 여성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세계 여성의 날이 하루 지난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 광장은 검은 옷을 입은 여성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낙태죄는 위헌”이라며 ‘임신중단’(낙태를 일컫는 비웨이브 용어) 합법화를 촉구했다.

이날 집회는 익명의 여성들이 모인 ‘비웨이브’(BWAVE)가 이끌었다. 이들은 2016년 10월부터 이날까지 19차례나 집회를 열었다. 집회 참가자들의 드레스코드는 검은 옷이다. 원하는 참가자들을 위한 검은 마스크도 준비돼 있었다. 2016년 10월 초 폴란드에서 생식권(reproductive rights)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검은 옷을 입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한 ‘검은 시위’를 본떴다. 폴란드 검은 시위에는 여성 뿐 아니라 남성들도 참여했지만, 한국판 검은 시위에선 남성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생물학적 여성’만 집회 참가를 허용하고 있어서다. 참가자들은 동원되거나 조직된 여성들이 아니라 온라인에서 집회 정보를 보고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선 이들이라고 한다. 취재진에게 사진촬영 가이드라인을 배포하고 남성의 집회 참가를 막는 것은 지난해 한국사회를 달군 ‘혜화역 집회’와 닮았다. 혜화역 집회는 ‘불편한 용기’가 주최한 ‘편파판결, 불법촬영 규탄 집회’다. 다음 카페 등 온라인을 기반으로 모이고, 집회에서 ‘친목’을 자제하도록 한 점, 모임 대표나 운영진은 없다는 점도 혜화역 집회와 닮았다.

지난해 11월16일에 이어 약 4개월 만에 열린 이날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3000여명에 달했다. 헌법재판소가 4월 중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제269조 및 제270조에 대한 위헌 여부를 결정하기로 하면서 낙태죄 위헌 결정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날 참가자들은 오후 2시부터 4시간 가까이 광장 바닥에 앉아 구호를 외쳤다. 주최 측은 온라인을 통해 6가지 구호문과 개사한 노래가사를 정리한 종이를 참가자들에게 나눠줬다. 구호 선창은 ‘총대’가 아닌 원하는 참가자들이 선착순으로 무대에 올라 외치는 시스템이다. 마이크를 잡은 참가자를 무대에 올라 ‘하용가’ 또는 ‘자이루’라고 인사를 하고, 원하는 구호문 하나를 선택해 선창한다. 하용가는 온라인에서 성매수를 목적으로 여성에게 접근하는 남성들의 인사말인 ‘하이 용돈 만남 가능?’의 줄임말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비웨이브는 ‘하이스펙 용기 그리고 가능성’이라는 다른 뜻을 붙였다. 자이루도 남성의 성기와 ‘하이루’를 결합한 말로 ‘자매님들 하이루’라는 뜻으로 쓰인다.

9일 오후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여성들 3000여명(주최 측 추산)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 모였다. ©이하나 기자
9일 오후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여성들 3000여명(주최 측 추산)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 모였다. ©이하나 기자

무대에서 “낙태죄는 위헌이다”라고 선창하면, 참가자들이 “위헌 결정 내놓아라”라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선창 구호는 운동권이 주최하는 집회에서의 선창과는 사뭇 다르다. 참가자들은 말 그대로 ‘악’을 쓰듯 온힘을 다해 구호를 외쳤다. 울분이 담긴 듯한 선창이다. 이밖에도 “인간이 될 가능성이 낙태의 처벌근거? 가능성은 내가 정한다.”, “생명이 소중하다고? 내가 그 생명이다.”, “우리는 기필코 빼앗긴 권리를 되찾을 것이다.”, “세포 대신 여성 인권이나 신경 써라” 등의 구호가 쏟아졌다. “낙태죄 폐지 국민청원 이십만이 우스웠다”며 “문재인을 탄핵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비웨이브는 낙태죄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며,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게 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법이자, △낙태죄가 가부장제의 동력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들은 “낙태죄는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가부장적 사고를 적나라하게 반영한다”며 “낙태죄는 여성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남성의 개입을 허용함으로써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박탈했다”고 비판했다. 이날 비웨이브는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은 여성의 기본권에 대한 월권행위를 자행하며 가부장제에 기생하는 방식으로 유지돼 왔다”며 “가부장제 존속을 위한 무단으로 탈취한 임신중단권을 반환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대한민국 형법은 여성이 낙태(임신중절)하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 벌금(269조 1항)에 처하고, 낙태를 한 의사는 '2년 이하의 징역'(270조 1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이 낙태죄 처벌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을 심리 중인 헌재는 오는 4월 11일 위헌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헌법소원은 2017년 2월 제기됐다. 지난해 5월에는 공개변론이 열렸고 그해 선고가 유력하게 점쳐졌으나 재판관 5명이 퇴임하면서 미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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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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