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판 ‘독립신문’의 여학생 일기
유관순·김마리아·어윤희…증거 많아
상해 독립신문 통해 피해사실 공론화
민족운동의 일환, '정조관념' 흔들어

 

만세운동 당시 여학생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배화여학교 학생들의 경우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1920년 3월 1일 만세시위를 벌였고, 검거된 학생 중 21명의 수형기록카드가 남아있다. 사진은 윤경옥(왼쪽), 김경화의 수형기록카드이다.
만세운동 당시 여학생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배화여학교 학생들의 경우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1920년 3월 1일 만세시위를 벌였고, 검거된 학생 중 21명의 수형기록카드가 남아있다. 사진은 윤경옥(왼쪽), 김경화의 수형기록카드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성고문에 대한 첫 폭로는 1986년 부천 성고문사건이다. 하지만 앞서1919년 3·1운동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일본 경찰로부터 당했던 성고문을 고발하는 글이 상해판 ‘독립신문’에 실려 공개됐다. ‘심원 여사’를 필명으로 한 이 글은 단순한 피해 호소나 자기고백을 넘어 근대교육을 받은 여학생의 주체성과 자기표현을 담은 100년 전의 ‘#미투’였던 셈이다.

3·1운동 당시 일본 경찰이 저질렀던 성고문은 경찰서에서 발가벗겨 나체로 심문하거나, 감옥에 수감된 여성들에게 성고문, 성적인 모욕을 하는 등 다양하다. 이를 드러내는 사실과 기록, 증언 등이 전해지고 있다.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진 원인이 자궁과 방광 파열이었다는 사실은 성폭력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준다. 또 다른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는 감옥 안에서 일본 경찰의 지시에 따라 나체로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런가하면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의 저자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은 1919년 3월 3일 개성지역 만세운동의 주역으로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어윤희 지사도 형무소에서 옷을 벗어야 했다고 전했다. 어 지사는 옷을 벗기려는 일경에게 몸에 손대지 마라, 내가 벗겠다면서 호통쳤다는 것이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성고문을 개인적 수치심이나 고통 정도로 그치지 않고 사회적 의미를 이끌어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상해판 독립신문의 연재소설 ‘여학생 일기’는 성폭력 피해를 고발한 일종의 미투운동으로 볼 수 있다.

상해판 독립신문의 1919년 9월 27일자 제14호부터 제21호까지 연재된 ‘여학생의 일기’ 중 일부
상해판 독립신문의 1919년 9월 27일자 제14호부터 제21호까지 연재된 ‘여학생의 일기’ 중 일부

상해판 독립신문의 1919년 9월 27일자 제14호부터 제21호까지 연재된 ‘여학생의 일기’는 근대교육을 받은 여학생의 3·1운동 체험이 담겨 있는 고백체의 일기문으로, 성고문에 관한 기록도 담겨 있다. 이상경 카이스트 교수의 ‘상해판 『독립신문』의 여성관련 서사연구’에 실린 상해판 ‘독립신문’에 실린 일기의 일부분은 이렇다.

종로경찰서에 구인되다. (…중략…) 양각(兩脚)을 박(縛)하여 궤좌케 한 후 문답은 의례히 타협(打頰)과 타면(唾面)하는 등 심지어 ‘매음여귀(賣淫女鬼) 회임처녀(懷姙處女)라는 등 온갖 욕설 패담을 거침없이 하다. 유방을 노출하라는 명령을 불응하매 피등은 나의 상의를 열파(裂破)하고 인구(人口)로는 인언(忍言)치 못할 언사로 조롱하다.

다수한 남자 중에서 아등 십여 명 여자를 탈의케 하고 신문(訊問)할 새 아등의 죄목은 다만 길에서 만세를 호(呼)한 것뿐이라.

처음 수감되어서 무수하게 매를 맞고 그 수에는 발가벗겨져 알몸으로 손발이 묶인 채 마굿간에 버려졌다. ..왜놈들은 예쁜 여학생 몇 명을 몰래 잡아가서 윤간하고는 새벽에 다시 끌고 왔다. 눈은 복숭아같이 퉁퉁 붓고 사지는 옭아 맨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 교수는 3·1운동 무렵 여성에게 가해진 각종 성고문을 폭로하는 기사는 여성에게 가해진 성적 모욕을 민족에 대한 모욕으로 전환시켜 남성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는 점과, 당사자인 여학생들은 그것을 폭로라는 형식으로 공적 담론의 장으로 끌고나와 민족운동의 명분을 획득하고 함으로써 전래 여성에게 부과된 성적 수치심이나 정조 관념으로부터 해방되고 담론에 균열을 일으켰다고 해석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소현숙 연구팀장은 “당시 여성이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신문에 글을 싣는 일은 정치 주체로서 여성이 형성되는 것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겪었던 성폭력에 대한 문제는 연구되거나 공론화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소현숙 팀장은 “연구자들은 여성이 3·1운동에 어떻게 참여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관심은 갖고 있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3·1운동이 어떤 사건이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는 점과 “특히 우리사회에서 성폭력이나 성희롱에 대한 문제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정도로 굉장히 늦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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