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법] 주장과 사실, 그리고 성인지 감수성
[모두의 법] 주장과 사실, 그리고 성인지 감수성
  • 박찬성 변호사‧포항공대 상담센터 자문위원
  • 승인 2019.03.08 07:42
  • 수정 2019-03-07 2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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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지 감수성은 사실 여부를
심사숙고해서 놓친 점은
없는지 꼼꼼히 따지라는 것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주장을 사실로 단정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박찬성 변호사. ⓒ본인 제공
박찬성 변호사.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말이 세간의 화제다. 대법원 판결(2018. 4. 12. 선고 2017두74702 판결)에서 처음으로 이 용어가 언급된 것이 벌써 1년 전 일이었지만, 지난 몇 주 사이만큼 이 말이 자주 회자된 적은 일찍이 없었던 듯하다.

필자가 출강하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공공기관 성희롱‧성폭력 고충상담원 대상 전문교육에서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에서는 성인지 감수성이 중요하다고 설명하는데, 그렇다면 피해를 주장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문제제기 내용은 처음부터 일단 사실이라고 믿고서 시작해야 한다는 거지요?’ 정답은 뭘까?

성인지 감수성에 입각해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은, 사실 여부를 따져봄에 있어서 피해자의 입장과 처지를 그 피해자의 관점에서, 보다 세심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알리고 문제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될 수 있다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에 따르면, 2차 피해가 두려워 피해자가 피해 발생 이후에도 가해자와 이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도 있고, 피해사실을 한참 후에 신고할 수도 있으며, 절차진행 중 다소 소극적인 태도로 진술에 임할 수도 있다는 여러 요소들을 감안해야 한다. 표피적으로 드러난 일부 사정에 기하여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의 진술을 섣불리 배척해 버리고는 사실여부를 함부로 판가름 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말인즉, 한 번 더 꼼꼼히 살펴보라는 의미다. 정말로 중요한 원칙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장’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로 인정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과는 다르다. 주장이 곧바로 사실로 확정될 수는 없는 법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주장이 사실이 되려면 입증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주장된 내용의 진위를 검토할 때 피해자의 상황과 처지를 충실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 피해주장이 있기만 하다면 입증된 바가 없더라도 언제나 그 문제제기의 내용을 사실로 믿어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객관성을 모두 포기하고 이른바 ‘관심법’으로 사안에 접근해도 괜찮다는 의미도 결코 아니다.

그래서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은 사실 여부를 보다 신중하게 심사숙고해서 혹시 함부로 놓치는 점은 없는지를 ‘꼼꼼히 따지라는’ 것이지, 문제제기가 있기만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 주장을 사실로서 미리부터 단정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의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니오’가 된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그런 세부적인 내용은 법관들만 잘 알면 족하지 않나요? 법 전문가 아닌 일반인들이 굳이 알 필요가 있나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일례로, 범죄 아닌 성희롱의 경우는 다른 일반적인 업무상 비위와 마찬가지로 1차적으로는 공공기관이나 사업장 내에서 징계대상으로 다루어야 하는 문제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법률가 아닌 고충처리담당자나 징계심의 관여자도 이 개념의 참뜻을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크다. 위의 대법원 판결도 기관 내의 성희롱 대상 징계처분의 적법성이 다투어졌던 사건이었다.

다른 이유도 있다.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마치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근본원칙을 도외시하는 것인 양 오해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말 그대로 오해에 불과하다. 이는 위에서 보듯, 피해주장이 있기만 하면 언제나 마구잡이로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 여부를 잘 따져보라는 주문이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실제로 세상에는 음해성 무고라는 것도 전혀 없지는 않다. 개념에 대한 오해로 일선 현장에서 행여 판단을 그르쳐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리는 이가 나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몰이해가 반감으로 이어지고 불필요한 논란으로 비화되는 것 또한 성평등의 진작에 심각한 해악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한 번쯤은 제대로 이해해 볼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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