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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운영의 일상적인 몫 이외에 굵직굵직한 학교행사 또한 어머니들의 노력봉사 없이는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학예회는 말 뜻대로라면 학생들의 학습과 예능에 대한 재능이나 작품을 공개하여 보이는 모임이다. 그런데 여기에 ‘부모참여’ 또는 ‘가족참여’라는 매우 그럴듯한 명분이 붙는 순간, 이것은 어른들 특히 어머니들의 행사로 바뀌어 버린다. 학교는 아래의 공문에서 볼 수 있듯이 학예회 한 달 전부터 어머니들을 불러 학예회 준비 연수를 시키고 가족작품 준비를 독려한다.

00초등학교장

…아뢰올 말씀은 2002학년도 학교 교육과정 운영 계획에 의하여 2년마다 실시하는 종합 예술제를 올해 10월에 실시합니다… 작품 제작은 우리 주위에 있는 폐품을 활용하여 반 어린이들이 협동심을 발휘하고 창의적이고 다양하며 기발한 아이디어를 모아서 모두 협동 작품을 제작하며 가족 작품도 새로운 생각으로 만듭니다. 이에 따라 작품 제작의 방법과 새로운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는 좋은 방법과 학급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연수하고자 하오니 바쁘시더라도 꼭 참석하시어 훌륭한 종합예술제가 되도록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가족작품으로 전시된 작품들은 적지 않은 것들이 상당한 수준의 어른들 작품이다. 몇몇 교사를 제외하고는 담임들은 가족작품을 숙제로 내주며, 결국 이 숙제는 엄마 숙제거나 누나나 형, 언니들의 몫이 된다. 내 아이의 경우, 물감 뿌리기, 가족작품 만들기는 내가 해주었고 미래 자기 모습 그리기는 중3인 누나가 해주었다. 미래 자기 모습 그리기의 경우는 첫 번째 그려간 것이 못 그렸다고 퇴짜 맞고 와서 다시 누나가 훨씬 더 정성을 더해 그려주어 겨우 합격할 수 있었다.

반면에 몇몇 교육력 있는 교사는 정규 수업시간에 아이들 스스로 만들고 그리도록 해서 학예회를 준비시킨다. 부모들에게는 훌륭한 교사로 회자되는 이런 선생님 반은 학예회에 수준급의 작품은 내놓지 못한다. 그러니 당연히 교장 선생님께 잘 보이긴 어렵고 평가에서의 불이익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준비된 작품들은 마지막 단계에서도 반마다 동원된 몇 어머니들의 손으로 전시되고 비로소 전시회 준비는 완료된다.

한편 학교가 점수벌레를 길러내는 곳으로 전락하면서 아이들의 사회성을 길러주는 생활교육 또한 실종되었고 어머니들이 이 부분을 메워 주고 있다. 중학교에는 임원 학생의 부모가 학부모회의 임원이 되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부모회가 아이들의 몫을 대신하는 현상을 자연스럽게 해주고 있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반 아이들이 아침자습 시간이나 방과후에 짬을 내어 선생님께 드릴 선물에 대해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내놓고 더불어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릴 깜짝쇼를 의논도 하고 기획하고 방과후에 솔선수범해서 선생님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쇼핑도 한다면 이것은 아이들 스스로 하는 얼마나 훌륭한 사회교육이 되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을 솔선수범 해야 할 임원 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방과후에는 학원으로 달려가기 바쁘다는 사실이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스승의 날 준비 또한 어머니들의 몫이 돼버린다. 임원진 어머니들은 살림 수완을 발휘해 남대문 시장 같은 곳으로 달려가 최대한 싼 가격으로 가능한 양질의 선물을 준비한다. 집으로 들고 온 수십 개의 선물을 나누어 포장하고 선생님 이름표를 붙이고 당일에 비로소 전달식을 치른다. 대개 어머니회나 명예교사회가 맡아서 하는 이 일만 족히 일주일은 매달려야 하는 일거리이다.

자발적이 되다시피 한 이런 어머니들의 협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거리를 생기게 한다. ㄱ중학교의 산행에서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음료수 대신에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깎은 오이를 제공하기로 하고 이 일에 어머니회도 참여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집에서 오이 깎기가 편하다고 생각한 임원 어머니들은 아예 이 일을 도맡았고 이웃의 십여 명의 어머니들에게 오이 깎기를 분담시켜 총 600개의 오이를 깎았다.

ㅅ초등학교는 중국의 한 초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중국학생들이 한국 방문을 하자 바빠진 건 임원 어머니들이었다. 전교 회장 어머니는 각 아이들이 민박할 집을 임원 어머니 집들을 중심으로 할당하고 관광 일정을 정하고 함께 관광을 나가는 등의 일을 진행하였다. 아이들이 떠나기까지 일주일 동안 어머니들은 완전히 이 일에 매달려 있어야만 했다. 학교의 국제교류라는 꽤 큰 사업도 알고 보면 거의 전적으로 어머니들의 노력봉사에 의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외국에서는 학부모 회의를 부모 퇴근 시간 이후에 한다고 들었다. 우리 사회의 부모들의 경제활동 참여 현실도 이러한 조처를 절박하게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기혼 여성의 반, 기혼 남자의 90%가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전업주부의 봉건적 노력봉사를 요하는 학교 운영 시스템에 부응할 수 있는 부모는 전체 부모의 1/4에 불과하다. ‘일체의 학부모 회의는 부모 퇴근 이후에 한다’는 조처 하나만으로도 학교는 적지 않은 변화를 겪을 수 있을 것이다.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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