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있는 그 곳에 사람이 산다] 용인시 머내 마을 ‘머내여지도’
자발적 참여로 뭉친 여성 회원 중심으로 3년간 마을 주민 50여명 인터뷰
수지구청 범죄인 명부에서 독립유공자 15명 발견
독립유공자 후손 인터뷰 할 때는 같이 공감하면서 눈물 흘리기도
3.29 머내 만세운동의 기록 영원히 남기려고 고기초에 표석 세우기로
아이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동네의 역사와 지리 기록

머내여지도팀이 3.29 머내만세운동 99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마을 아이들과 함께 태극기 그리기를 하고 있다. ⓒ머내여지도팀
머내여지도팀이 3.29 머내만세운동 99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마을 아이들과 함께 태극기 그리기를 하고 있다. ⓒ머내여지도팀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대한민국 농부작가로 유명한 전우익 선생의 신념이자 그가 지은 책 제목이다. 그런데 이 말을 실천하고 사는 도시민들을 만났다. 그것도 아파트로 빼곡히 둘러싸인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과 동천동에서.

고기동과 동천동의 옛 지명은 ‘머내’다. 머내의 어원을 찾으려면 17세기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병자호란에 험천전투가 나온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히자 충청감사 정세규가 수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왕을 구하기 위한 전투를 벌이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19세기에 들어 한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천(하천)이라는 이름의 머내로 바꿨다고 한다.

이런 마을의 역사 이야기를 발굴하며 마을 공동체 이야기를 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았다.

머내여지도팀이 아이들과 함께 3.29 머내만세운동에 참가해 밝게 웃고 있다. ⓒ머내여지도팀
머내여지도팀이 아이들과 함께 3.29 머내만세운동에 참가해 밝게 웃고 있다. ⓒ머내여지도팀

바로 ‘머내여지도’다. 머내여지도는 지금의 고기동과 동천동에 해당하는 ‘머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머내여지도라는 이름은 ‘대동여지도’에서 따왔다. 주민들 10여명이 마을의 역사적, 지리적 환경을 탐구하고 마을의 변화상과 현재의 모습을 취재하며 활동 중이다.

작은 소모임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들의 족적은 결코 작지 않다. 100년 전 3.1운동의 일환인 3.29 머내 만세운동에서 유공자 15명 발굴, 300여명이 참여한 3.29 99주년 만세 운동 재현, 170쪽 분량의 머내여지도 연구자료집 2권, 영남대로(현 경부고속도로) 옛길 발견, 머내 주막터 발견, 낙생저수지 두꺼비 서식처 보존 등이다.

“처음에는 저희가 살고 있는 마을의 역사를 알고자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을 했는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게 됐죠.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고 지난해가 99주년이었는데 역사책에서 배웠던 3.1운동이 우리 마을에서도 3.29일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머내여지도 회장을 맡고 있는 오유경씨 이야기다.

“하지만 비전문가인 저희들은 어떻게 이것을 증명해 낼지 너무나 막막했어요. 근데 마침 김창희 선생(기자출신, 오래된 서울 저자)을 만나면서 얽혀있던 실타래가 하나씩 풀지는 것처럼 일이 풀려나갔어요” 최은정 회원의 말이다.

머내여지도 팀이 주최한 3.29 머내만세운동 99주년 행사에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머내여지도팀
머내여지도 팀이 주최한 3.29 머내만세운동 99주년 행사에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머내여지도팀

김창희 회원은 동천동 주민이자 머내여지도를 포함, 고기동과 동천동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모임을 대상으로 지역의 역사와 지리, 지역 활동에 대한 강의를 하던 강사였다.

머내여지도가 찾은 3.29 만세운동은 당시 용인군 수지면 고기2리 샛말(현재 광교산 중턱)에서 구장(현재 이장) 이덕균과 고기1리 손기마을 주민 안종각의 주도로 시작됐다. 안종각은 이불 호청을 뜯어 만든 태극기를 가지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때 마을 훈장이었던 이덕균이 적극 호응하면서 시위가 본격화 됐다.

1919년 3월 29일 오전 9시경, 이덕균은 집집마다 1명씩 대표로 나온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고기리 주민 100명으로 시작된 시위 행렬은 동막리, 동천리, 풍덕천리를 지나면서 600명으로 늘어났다. 다시 수지면사무소에 이르러서는 어느덧 1000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일본 헌병대의 총부리가 시위대로 향했고 여기서 만세운동의 주도자인 안종각과 최우돌이 총격에 의해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참가자들이 무더기로 용인헌병대에 잡혀 들어갔다. 일제는 이후 이덕균을 체포해 1년 6개월 형을 선고하고 서대문형무소에 가뒀다. 이것이 공식기록 전부다.

머내여지도 팀 이 마을을 유적지를 조사하고 있다. ⓒ머내여지도팀
머내여지도 팀 이 마을을 유적지를 조사하고 있다. ⓒ머내여지도팀

이 후 시골마을의 3.1운동 역사는 까마득하게 잊혀졌다. 그것을 99년 만에 머내여지도 회원들이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회원들은 머내 3.29만세 운동을 세상에 끌어내면서 기념행사도 함께 했다. 고기초등학교에서 만세를 부르면서 옛 수지면사무소까지 3.5km정도를 행진했다. 이때 참석한 지역 주민만도 300여명이 넘었다.

회원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인터뷰 할 수 있었다. 한덕희 회원은 인터뷰한 후손들 중에 홍봉득 할아버지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분은 머내여지도가 찾아낸 15명의 독립유공자 중 홍재택 선생의 손자다. 홍봉득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에 너무나 애정이 커서 자손들의 생일을 3월 1일과 8월 15일 두 개의 날짜로 모았다. 상반기에 태어나면 3월 1일이고, 하반기에 태어나면 8월 15일이다.

“홍봉득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홍재택 할아버지가 3.1운동에 가담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 기록을 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을 하셨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야기만 들었지 문서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어서 매우 실망이 크셨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한덕희씨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머내여지도팀은 당시 수지면사무소에서 이 기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자료를 현재의 수지구청에서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구청을 방문했다. 처음에는 공적조사에서 자료를 뒤졌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애타게 찾던 3.1운동의 기록은 놀랍게도 범죄인 명부에서 나왔다. 1000페이지 분량의 범죄인 명부에는 당시 머내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15명이 ‘보안법 위반’이란 죄명으로 ‘태 90’이라는 즉결처분과 함께 범죄자의 직업, 연령,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 기록은 곧바로 경기동부보훈지청으로 넘겨졌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새롭게 독립유공자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보훈지청 양진건 팀장은 “정부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을 민간에서 그것도 마을의 지리를 연구하는 모임에서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죠. 앞으로 머내만세운동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행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머내여지도팀이 마을 주민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머내여지도팀
머내여지도팀이 마을 주민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머내여지도팀

지난해 99주년 행사에 이어 올해 100주년 행사를 진행한다. 올해 행사는 머내여지도팀 단독이 아니라 관(용인시청, 수지구청, 경기동부보훈지청)과 함께 준비를 한다. 올해 행사는 3월 30일에 열린다.

오유경 대표는 “올해도 지난해처럼 아이들에게 태극기를 그리는 체험을 하게 할 것이고요. 또 옛날 수지면사무소가 있던 자리에서는 3.29만세 운동 때와 같이 일본 형사 복장을 입은 사람을 준비해서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할 계획이예요”라고 말했다.

이번 행사에서는 지난해와 다른 몇 가지를 더 준비했다. 고기초등학교 앞에 3.29 머내 만세운동의 시발점이라는 표석을 세우고 제막식 행사를 진행한다. 또한 느티나무 도서관 앞에도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의 기록을 적은 표석을 세울 계획이다.

머내여지도팀은 매주 토요일에 한 번씩 동네의 ‘우주소년’이라는 작은 책방에서 모임을 한다. 3년째 한주도 거르지 않았다. 회원들의 출석률도 90% 이상이다. 이유를 물으니 회원들은 하나같이 ‘자발성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매주 모여서 인터뷰를 할 마을 주민을 선정하고 인터뷰할 사람에게 어떻게 접근할지 방법을 찾는다.

오유경 회장은 “지금까지 마을 주민 50여명을 인터뷰 했어요. 하지만 주민들을 인터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예요. 특히 할머니들이 많이 외면을 하고 계시는데요. 이유를 들어보면 젊은 시절에 너무나 많은 고생을 했고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치게 싫다고 하세요. 3년이 다 되 가지만 아직도 인터뷰를 해 주지 않은 할머니가 계세요. 독립운동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아직도 말을 잘못하면 해코지를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계세요. 그럴 때면 너무 맘이 아프죠”라고 말했다.

이보영 주민자치위원장은 “처음에 이분들이 동네 주민들을 인터뷰 하고 다닐 때는 약간 이상하게 생각을 했어요. 원주민도 아닌데 왜 ‘동네의 역사를 묻고 다니지’ 하면서요. 하지만 지금은 이들이 없었으면 어떻게 우리 동네의 독립운동이야기를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라는 점에는 매우 고맙고 기쁘게 생각해요”라며 머내여지도팀에게 힘을 보태고 있다.

머내여지도의 모든 활동은 아이들과 함께 이뤄진다. 인터뷰를 할 때도 동네의 역사를 기록하는 현장을 조사할 때도 회원들 곁에는 늘 아이들이 함께 한다.

한덕희 총무는 “부모들은 새롭게 만들어진 신도시로 이사를 와서 살았지만 아이들은 이곳이 고향이 되는 것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애정을 가지고 마을을 살펴보라는 의미와 함께 잘 살아가는 공동체를 몸으로 느꼈으면 하는 바람에서요” 라는 소망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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