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 한국사회 바꾸고 있다
‘성인지’, 한국사회 바꾸고 있다
  • 진주원 기자
  • 승인 2019.02.15 08:05
  • 수정 2019-02-15 0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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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입법 넘어 사법부로 확산
민주당, 선거 후보 성인지평가도
“기업·단체서 업무방식, 조직문화로”
‘안희정 무죄판결에 분노한 항의행동’이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비서 성폭행 혐의를 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1심 무죄판결을 규탄하는 ‘안희정 무죄 선고한 사법부 유죄’집회를 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해 8월 14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비서 성폭행 혐의를 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1심 무죄판결을 규탄하는 ‘안희정 무죄 선고한 사법부 유죄’집회 모습.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수행비서 성폭행 혐의 항소심 재판에서 징역형이 선고된 이유는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관점으로 성폭력 피해자를 본 재판부의 판결 때문이다.

낯설게만 보였던 ‘성인지(性認知·gender-sensitive)’ 용어가 어느새 사회 곳곳에 뿌리내려 변화를 이끌고 있다. 한 주요 일간지가 모 정당의 대선 경선 후보 TV토론회에서 ‘성인지 예산제’와 관련한 논의를 ‘성인잡지’로 잘못 보도했고, 이튿날 정정보도를 냈던 게 2017년 3월, 불과 2년 전 일이다. ‘성인지 예산제’가 2006년 법제화되는 등 2000년대 초반부터 국가를 운영하는 행정부, 입법부에 도입됐다는 점에서 저변 확대가 얼마나 더딘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보수적인 사법부의 전향적 판결은 의미가 크다. ‘성인지’가 실제로 어떻게 국가 시스템과 공적 영역에 적용되고 있는지 살펴봤다.

행정부가 끌고 입법부가 밀고

‘성인지’는 1995년 북경 유엔여성대회에서 성주류화를 제도에 적용하는 방법으로 사용되면서 각국에서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사회 모든 영역의 요소가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후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설치에 이어 2001년 여성부를 설치하면서 여성정책이 본격화되면서 각종 제도 속에 정착했다.

성주류화 조치에 따라 2002년 여성발전기본법 일부 개정으로 성별영향평가와 성인지 통계의 근거조항이 마련됐다. 이어 2006년 국가재정법 제정, 2011년 지방재정법 개정으로 ‘성인지예산제도’가 도입됐고, 2007년 통계법상에 성인지 통계가 명시됐다. 2011년에는 성별영향분석법이 제정됐다. 지난해 연말엔 공무원 대상 ‘성인지 교육’을 의무화하도록 양성평등기본법이 개정됐다.

행정부의 이같은 법과 제도는 입법부인 국회가 함께 만든 결과물이다. 국회에도 상임위원회 중에서 여성정책을 담당하는 여성가족위원회가 있어 관련 법률안을 심사하고 예산안을 심사한다.

법률과 예산뿐만 아니다. IPU(국제의회연맹)은 2012년 ‘성인지 의회 행동계획’을 만장일치로 채택해 각국 의회에 성주류화를 촉구하고 있다. ‘성인지 의회’ 행동지침으로 △의회에서 여성의 숫자를 늘리고 참여의 평등 달성 △의회업무 전반의 성주류화 △성인지적 인프라와 의회 문화 조성 △정당의 성평등 이슈 주도 등을 제시했다.

실제로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6·13지방선거를 앞두고 공천심사기준에 성인지 관점을 포함시키는 성과를 보였다. ‘성인지 역량’ 항목으로 성(별) 균형 인사 및 여성 대표성, 성인지 예산, 성인지 교육, 지역 성평등 전략 및 계획 수립 등이 후보자를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지난해 대법원 ‘성인지’ 판결 잇따라

‘성인지 감수성’이 판결문에 처음 등장한 것은 불과 1년이 되지 않았다. 지난해 4월 12일 대법원의 대학교수의 성희롱 사건 관련 판결에서다. 당시 재판부는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면서 ‘양성평등기본법 제5조 제1항 참조’을 제시했다.

제5조 제1항은 ‘국가기관 등은 양성평등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국가의 책무를 명시하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인식의 지평과 태도를 분명히 제시한 것이다.

안희정 전 지사의 항소심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언급한 ‘성인지 감수성’은 지난해 10월 대법원 판결을 인용한 것이다. 친구의 아내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남성이 무죄를 선고받아 피해자 부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대법원이 파기 환송해 징역 4년6개월 형이 선고됐다.

‘감수성’이라는 개념이 모호해 법률 용어로 부적절하다는 일부 비판도 있지만, 단어 하나를 놓고 논쟁하기보다 법원이 사건을 심리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했다는 의미가 더욱 크다. 또 ‘인권 감수성’이라는 용어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같은 흐름을 볼 때 ‘성인지 감수성’은 성희롱·성폭력 사건 재판에 더욱 자주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성인지 더욱 확대되려면

성인지 관련 용어가 쓰인지 20년 가까이 돼가면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지만 나갈 길은 여전히 멀다. 예를 들어 제도상으로는 성인지예산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기획재정부 내에 성인지 예·결산서 및 성인지 기금운용계획서·기금결산서 작성 전담부서를 설치하도록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현행법상 국가와 지자체의 책무인 ‘성인지’가 이제는 조직 곳곳에 내재화돼야 할 시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차인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입법심의관은 “성인지 관련 제도나 정책 등이 ‘형식’을 넘어 ‘내용’이 현장에 뿌리내려야 한다”면서 “기업과 정당, 단체 등으로 확산돼 업무방식, 인사원칙, 조직문화로 통합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한체육회’ 같은 단체가 성인지적으로 운영되지 않으면 체육계 성폭력 사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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