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있는 그 곳에 사람이 산다] 부여군 규암마을
해방 전후 200세대 살던 규암마을
오래된 골목 상점 리모델링해서
공방, 갤러리, 서점, 숙박시설 등 만들어
문화가 살아있는 콘텐츠로 도시재생
직원 10명 중 8명이 여성
주민·관광객 함께하는 프로그램도 기획

부여 자온길 지도.
부여 자온길 지도.

‘아리수’, ‘한수’, ‘한가람’ 이 한강의 옛 이름이듯. 금강은 충남 부여에선 백마강으로 불린다. 백마강변의 작은 마을 규암리를 찾았다. 최근 이곳에 들어선 공방, 책방(동네서점), 커피가게, 백제술집 등에 젊은 발길들이 모인다는 소문을 듣고서다.

이 모든 공간을 만들어 낸 사람이 한 명의 여성이다. 인사동에서 시작해 북촌, 서촌, 헤이리 마을 등 대표적인 문화 거리에 공예와 갤러리, 전통문화 편집샵 등을 탄탄하게 운영하고 있는 공예전문가 박경아씨다.

박씨는 현재 ‘자온길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낡고 허름한 부여의 작은 시골 마을에 전통문화라는 씨줄과 공예라는 날줄로 새로운 마을을 3년째 만들고 있는 중이다.

“작가들이 쫓겨나지 않을 공간을 만들고 싶었고 공간 매입가가 비싸지 않아야 했고 새로 짓는 공간은 싫었고 관광객이 올 수 있어야 했고 무엇보다 이미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도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어야 했다.”

규암마을을 선택한 박 대표의 첫 마디다. 도시에서 사업을 하면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둥지 내몰림 현상)에 정말 많이 시달린 모양이다.

박 대표의 이야기처럼 규암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여느 시골처럼 다 쓰려져 가는 집과 손님들이 좀처럼 찾지 않은 않을 것 같은 가게들만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을 분들이 그러는데 규암마을은 해방 전후만 해도 200여 가구가 살았던 큰 마을이었다고 해요.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극장터와 백화점터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요. 1968년 마을 앞에 백제교가 생기고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중심지 기능이 부여읍으로 이동한 후 마을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상권은 쇠퇴하기 시작 했다고 하더라고요.”

세간 박경아 대표가 공예 매장에서 밝게 웃고 있다. ⓒ여성신문
세간 박경아 대표가 공예 매장에서 밝게 웃고 있다. ⓒ여성신문

50년의 세월 먼지만 켜켜이 쌓여 가던 규암마을에 들어온 박 대표는 투자자들의 도움을 받아 공방, 갤러리, 편집샵, 북카페, 숙박시설 등을 만들기에 필요한 땅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규암면 자온로와 수북로와 일대의 집 16채와 대지 1만3200㎡(4000평)를 구입하거나 지인들과 매입해 공간을 장기 임대하는 방식으로 확보했다.

매입한 부동산은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기존 건물을 바탕으로 공간의 역사적 스토리에 현대적 감각을 더하는 리모델링 방식을 택했다. 공방으로 사용되는 웃집은 리모델링의 백미다. 페인트가 벗겨져 볼품이 없던 벽면을 새롭게 바르지 않고 사포로 잘 벗겨냈다. 그 결과 벽에 멋진 그림이 생겼다. 옛날 건물의 결을 그대로 살려 복원한 것에 놀랐다.

시골이라면 정말 많은 장소가 있는데 왜 부여였을까 궁금해 졌다.

“부여에 있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했어요. 처음 부여와 왔는데 관광지로서는 너무나 훌륭한 시설과 자원을 가지고 있었어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시여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데도 숙박시설이 턱없이 부족하고 문화콘텐츠도 많이 부족했어요.”

부여는 국토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전국 어디서든 2~3시간이면 접근할 수 있다. 백제가 융성했던 시절의 문화유산을 담고 있다. 1500년 전의 탑이 도시 한가운데 있고 ‘부소산성’, ‘낙화암’, ‘궁남지’,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 5층석탑’ 등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이다.

“처음에 이곳에 와서 건물과 땅을 매입하니까 동네 주민들이 투기꾼 아니냐며 의심의 눈길로 보셨어요. 하지만 직원들과 힘을 합쳐 건물의 쓰레기를 치우고 서점, 커피숍 등을 하나 둘씩 만들어 내니까 이제는 저희를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매우 친근해 하시죠(웃음).”

이병헌 전 규암면장은 “세간이 들어오기 전에 이곳은 일 년에 7~8채씩 멸실(주인이 관공서에 집을 허물겠다는 하는 것)을 신청할 정도로 낙후된 곳이었요. 하지만 세간에서 하는 활동을 직접 보고 동네 주민들도 생각을 고쳤어요. 이제는 멸실 신청도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동네가 너무 활기차졌어요”라고 말한다.

윤현숙 규암마을 부녀회장은 “노인들만 사는 시골에 젊은 친구들이 들어와 주어서 너무 고맙고 서점에서 여름이면 시원하게 겨울이면 따뜻하게 책을 볼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요. 그리고 공예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했는데 실제로 공예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마을에 있는 것이 너무나 가슴 뿌듯해요”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웃집-공방 공사 전 모습. 시골 5일 장터의 국밥집으로 쓰였던 웃집 공방의 옛모습. ⓒ여성신문
웃집-공방 공사 전 모습. 시골 5일 장터의 국밥집으로 쓰였던 웃집 공방의 옛모습. ⓒ여성신문
웃집-공방 공사 후 모습. 공예작가가 상주하면서 염색 등의 공예 체험을 할 수 있다. ⓒ여성신문
웃집-공방 공사 후 모습. 공예작가가 상주하면서 염색 등의 공예 체험을 할 수 있다. ⓒ여성신문

현재 자온길 프로젝트는 5개의 건물이 리모델링해 영업 하고 있다. 추가로 3개의 건물이 올해 상반기에 문을 열 계획이고 8개 공간도 설계를 모두 마무리하고 준비 중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독립서점 ‘책방세간’이다. 여긴 80년 된 담배 가게를 리모델링해서 만든 곳이다. 담배를 팔던 공간은 책방의 서가로 만들었고 진열장은 책장으로 변신했다. 담배 가게라는 특징을 살려 책방 내부 벽면에 은박 벽지를 발라 담배 속지를 표현했다.

박 대표는 “이곳은 자온길 프로젝트의 허브이자 주민들의 커뮤니티 플랫폼으로 자리를 잡았어요. 이곳은 책방인데도 더운 여름날엔 마을 주민들이 논에 김을 매다가 더위를 피하는 쉼터 역할도 하죠(웃음).”

백년한옥 스테이 ‘이안당’은 자온양조장 주인이 살았던 공간이다. 이곳은 전통가옥 형태 그대로 복원해서 숙박시설로 사용 중이다. 벌써부터 입소문을 타고 여러 기업에서 워크숍을 하기 위해 다녀갔다.

옛날 요정을 카페와 소곡주 전문점으로 바꾼 ‘수월옥’도 인기 장소다. 이곳은 커피를 주문할 때 일반 커피전문점과 다르게 주문을 해야 한다. “아메리카노로 주세요”가 아니라 “백자에 담은 아메리카노 주세요”라고 해야 한다.

박 대표는 “공예는 아는 만큼 더 애정이 생긴다고 생각을 해서요. 고객들이 우리의 고유의 자기를 구분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만들어 운영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천연염색을 체험할 수 있는 ‘웃집’이다. 이곳은 과거 국밥을 팔던 식당이었다. 규암 5일장의 중심에 있었던 건물로 쇄락 이전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웃집은 공예체험과 숙박을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려졌다. 주거 공간 뒤뜰에는 마당이 있어 염색한 천을 널기에 안성맞춤이다.

한식당 ‘매화에 물 주거라’는 이름부터 독특하다. 퇴계 이황선생의 유언에서 따왔다. 이곳의 안주인은 유명한 밥 디자이너 유바카(본명:유미리)씨다. 유씨가 세간에 결합해서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식당 이름처럼 뒤뜰엔 큰 매화나무가 있다.

세간의 식구들은 80%가 여성이다. 남성들도 하기 힘들다는 도시재생 사업을 여성의 힘으로 꾸려 나가고 있다. 직원들의 이력도 매우 다양하다. 가장 눈에 띄는 분은 부여지역에서 75년을 살아오신 박행자 할머니다. 이분은 세간의 젊은 여성들의 열정에 반해 합류를 하고 정착에 많은 도움을 줬다. 여기에 밥 디자이너 유바카씨와 한국무용을 전공한 분이 카페지기로 결합을 했다. 프랑스에서 살다 오신 직원과 염색공예를 업을 하는 직원까지 자온길 프로젝트에 최정예로 뭉쳤다.

박행자 할머니는 “처음엔 마을을 새롭게 바꾸겠다고 나선 젊은 친구들이 기특해서 밥이나 해주자는 맘을 시작을 했지. 근데 이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까 나도 젊어지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함께 쓰레기도 치우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버려지는 옛날 물건은 몽땅 주어다가 줬어. 그런 것이 마을 곳곳에서 새롭게 쓰이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신바람이 났지”라고 말했다.

세간의 노력에 부여군도 답을 하고 있다. 부여군 안중완 팀장은 “현재 규암면에 근대문화거리 조성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약 80여억원의 예산을 확보한 상태이고 조례 개정을 통해 이곳에 공예 등 문화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곳으로 도시재생을 추진 중에 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마을 앞산에 ‘자온대(自溫臺)’라는 바위가 있는데 백제왕이 연회를 하면 바위가 스스로 따듯해 졌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해요. 자온대를 새롭게 해석해서 누구나 찾아오면 따뜻한 누비이불처럼 덮어주고 휴식을 줄 수 있는 그런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수월옥 주점 공사 후 모습. 도로변으로 시원하게 창문을 냈으며수월옥 내부의 따뜻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 여성신문
수월옥 주점 공사 후 모습. 도로변으로 시원하게 창문을 냈으며수월옥 내부의 따뜻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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