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형 연출의 연극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의 한 장면. ⓒ샘컴퍼니 제공
오이디푸스의 한 장면. ⓒ샘컴퍼니 제공

 

배우들의 비장감 있는 연기. 여러 영상 투사막(벽)을 활용해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입체적인 무대. 역동적인 코러스의 움직임과 그들이 내는 흉조 소리 등 강렬한 시청각 이미지. 현대적 감각의 이러한 요소들이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25세기 전에 쓰인 그리스 비극의 동시대적 의미를 살려낸다.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 위에 올려진 연극 ‘오이디푸스’가 전경화하는 것은 인간이 신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다. 운명의 화살이 자신의 심장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용기 있게 진실과 대면하려다 결국 자기파멸로 치닫는 영웅 오이디푸스의 모습을 통해서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저주스러운 신탁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결국 신의 뜻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오이디푸스는 제 손으로 두 눈을 찌르고 거친 광야를 헤매게 된다.

오이디푸스의 한 장면. ⓒ샘컴퍼니 제공
오이디푸스의 한 장면. ⓒ샘컴퍼니 제공

소포클레스 원작의 비극을 한아름이 각색하고 서재형이 연출한 신작 ‘오이디푸스’는 무대가 돋보였다. 객석 바로 앞쪽에 드리워진 망사막, 장면에 따라 천장에서 내려오는 무대 가운데의 막, 맨 뒤편의 벽 등 3중의 영상투사장치를 활용해 신전, 궁, 갈림길, 광야 등의 다양한 공간과 어둡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신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신전의 이미지는 뒷벽의 영상으로 표현됐고,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의 황금 브로치로 자신의 두 눈을 찔러 피로 물드는 장면의 처절함은 천장에 걸렸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붉은 천의 이미지로 강화됐다.

그리스 비극의 핵심적인 요소인 코러스의 마른 나무와 흉조의 날개를 활용한 퍼포먼스와 합창, 꺄악, 꺄악~ 새소리도 극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중요한 이미지였다. 오이디푸스 출생의 비밀이 하나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저음계의 피아노 소리 역시 등장인물의 고통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중요 역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도 조화로웠다. 오이디푸스 역 황정민 배우의 다소 짓눌린 듯한 어조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비켜나가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좌절감을 드러내려는 연출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읽혔다. 극중 코러스장이 자식과 결혼해 그 사이에 아들·딸을 다시 낳은 이오카스테를 “세월을 앞에 두고 뒤로 걷는 여자. 늙지 않는 여자”라고 묘사한 것은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다. 과거 일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깊이 숨기고 있는 듯한 인상의 이오카스테 역 배해선 배우의 연기는 황정민의 연기와 합을 이룬다.

오이디푸스의 한 장면. ⓒ샘컴퍼니 제공
오이디푸스의 한 장면. ⓒ샘컴퍼니 제공

또 극중 상황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알려주고, 때로는 오이디푸스의 처지를 동정하면서 세상의 이치를 전하는 코러스장 역의 박은석 배우와 국립창극단 출신의 소리꾼으로 최근 연극 무대에서 좋은 연기력을 보이는 정은혜가 눈먼 예언자 테레시아스 역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테레시아스가 강요에 못 이겨 오이디푸스에게 “선왕 라이오스의 살인자는 바로 당신!”이라고 밝히면서 던지는 “눈먼 자가 보는 것(아는 것)을 눈 뜬 오이디푸스가 모른다.”는 말은 이 작품의 명대사 중 하나이다.

각색을 통해 이 작품이 눈에 띄게 강조한 것은 지도자로서의 덕목이다. 오이디푸스는 가뭄과 전염병으로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선왕 라이오스의 살인범을 끝까지 추적해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전모가 밝혀지고 그가 스스로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눈먼 채 광야로 떠나기 전의 대사, “나는 살았고…./그들을 사랑했고…./그래서 고통스러웠다….” 등 여러 대목에서 그 부분이 부각됐다.

또 오이디푸스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광야로 자신을 내모는 것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고 신이 정해놓은 운명을 극복하겠다는 강인함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오이디푸스의 한 장면. ⓒ샘컴퍼니 제공
오이디푸스의 한 장면. ⓒ샘컴퍼니 제공

모든 상황의 종료와 함께 비가 내리는 가운데 광야로 사라지는 오이디푸스를 보며 코러스장이 전하는 외침이 여운을 남겼다.

“오이디푸스를 보라/저 뒷모습을 본 자라면 명심하라/누구든 삶의 끝에 이르기 전에는/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전에는/사람으로 태어난 자신을 행복하다고 믿지 말라/그 인생의 갈림길에서!”

공연은 CJ토월극장에서 2월 24일까지.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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