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침묵에 갇혀 있는 뉴욕 시의 유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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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콜세지의 <갱스 오브 뉴욕>은 뉴욕 시의 기원을 서술하는 일종의 기원서사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시작되는 ‘처음’은 물론 일정 부분 그 이전의 역사적 시기를 이어받는 ‘나중’이기도 하다.) 이곳 초창기 뉴욕에는 말씀 즉 로고스가 있지 않고 폭력과 피가 있었다. <갱스 오브 뉴욕>은, 당연히 스콜세지 영화답게, 스스로를 ‘본토박이 뉴요커’라고 주장하는 도살자 빌과 그의 무리들, 그리고 그들보다 조금 더 늦게 이 ‘신세계’에 도착했을 뿐인 아일랜드계 이민자 프리스트 발론과 그의 무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웅장한’ 피의 제전으로 시작되어 빈약하고 상투적인 복수극의 서사로 진행된다. 아버지 프리스트 발론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아들 암스테르담이 16년 만에 소년원에서 나와 저 혈전의 장소 맨해튼 파이브포인츠로 돌아왔던 것이다.

연대기가 설명해 주듯이 맨해튼 섬은 네덜란드인들이 ‘원주민’ 인디언들에게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사들인 후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렸다가 네덜란드인들을 물리치고 이 섬을 차지한 영국인들에 의해 뉴욕으로 개명되었다. 그 뒤를 이어 아일랜드인을 비롯한 다른 유럽인들이 이 꿈의 도시를 찾아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뉴욕의 역사 혹은 기원서사는 그러니까 억지로 지워버린 기원을 끊임없이 보충할 뿐인 이민자들 사이의 일그러진 희비극일 수밖에 없다. 대서사로 구성된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서 비장하게 그러나 점차 거의 경쾌한 리듬으로 찢겨져 나가는 살덩어리들, 화면을 두텁게 덧칠하는 핏줄기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아이러니, ‘소극(笑劇)’의 페이소스가 스며들어 있다. 또한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피의 복수를 감행하는 아들의 이름이 ‘암스테르담’인 것은 영화의 서사를, 그리고 그와 더불어 뉴욕의 역사를 조롱하는 조크가 아닐까? 여전히 이민자들 사이의 주권 다툼이 끊이지 않는 미국 사회에 대한 풍자가 아닐까? ‘도대체 누가 더 기원에 가까이 서 있냐구? 아이고, 웃기지 마라! 다 터무니없는 헛소리다!’ - 그러나 영화는 이 정도의 풍자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누가 뭐래도 <갱스 오브 뉴욕>은 ‘갱 영화’이고, ‘갱 영화’답게 폭력의 미학과 (강하고 약한) 남성들의 절망, 배신, 연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도살자 빌과 그의 복수자 암스테르담 사이의 유사 부자 관계도 긴장된 역사 관찰을 지연시킨다. 1846년에서 남북전쟁, 그리고 그 와중에 일어난 1863년의 징병반대 드래프트 폭동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서사적 넓이를 획득하기보다는 가장 잔혹한 (그러나 고독한) 갱 빌과 친부와 양부 사이에서 고민하는 암스테르담의 개인 서사로 더 많이 기운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 - 처참하게 살해된 사람들의 무덤을 앞에 두고 계속 겹쳐지는 ‘이후’ 뉴욕의 발전된 모습들은 이민의 역사가 여전히 ‘이민자들 사이’의 역사로 씌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역으로 강조한다. 유령들은 아직도 충분히 출몰하지 못하고 있다!

김영옥/ 한국여성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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