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속으로] 초현실적 시어(詩語)들과 소리의 기이한 조화
[공연속으로] 초현실적 시어(詩語)들과 소리의 기이한 조화
  • 강일중
  • 승인 2019.01.28 13:54
  • 수정 2019-01-30 1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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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의 신창극 시리즈 3 ‘시(詩)'

잘못 들었나…?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인데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린다. 객석의 대화나 관객이 자기 자리를 찾아 움직이는 과정에서 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소음이며 그 속에 섞여 퍼진다. 청각신경을 바짝 곤두세워 보지만 그 방향과 내용을 종잡을 수 없다. 무대 뒤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극장 밖의 소리가 흘러들어오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든다. 왁자지껄하는 가운데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처럼도 들린다. 여럿이 함께 터뜨리는 웃음소리도 있다.

국립창극단의 신작 창극 ‘시(詩)’(연출 박지혜, 국립극장 하늘극장, 1월 18~26일)는 공연 전부터 객석에서 흡사 이런 환청을 경험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시작된다. 극의 흐름을 좇다 보면 창극이 시작되기 전에 객석에 들린 이 정체불명의 음향이 작품의 시간 개념에서 비롯된 것임을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소재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제목도 ‘시’다. 기승전결 구조의 ‘이야기’가 이 작품에는 없다. 창극의 기본적인 특성이 제거된 것이다. 아주 실험적이다. 무대에는 2명의 남녀 소리꾼(국립창극단 단원 유태평양과 장서윤)과 두 남녀 연극배우(양손프로젝트 단원 양종욱과 양조아)가 나와 ‘충만한 힘’, ‘작별들’ 등 여러 네루다 시의 발췌·재구성 시를 소리, 또는 낭송형식으로 읊는다. 대체로 초현실적인 내용의 시들이다. 네루다의 감각적인 시어들이 또 한 번의 압축과정을 거쳐 노랫말로 꾸며지고, 다시 소리가 되면서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기이한 조화다.

창극 '시'의 한 장면. ⓒ국립극장
창극 '시'의 한 장면. ⓒ국립극장

 

창극 '시'의 한 장면. ⓒ국립극장
창극 '시'의 한 장면. ⓒ국립극장

무대는 간밤에 파티가 있었던 공간. 시간은 이른 아침이다. 많은 사람이 여기서 만남의 장을 즐기고 떠났고, 세련된 디자인의 의자, 탁자, 테이블 등이 보인다. 오른쪽 테이블 위에는 정리되지 않은 빈 술병과 술잔 등 파티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던 공연 전의 소음은 시끌벅적한 지난밤의 소란했던 파티 현장 소리들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지고, 공연이 시작되면서 극은 자연스럽게 날이 밝아온 시점으로 넘어간다. 처음 무대에 등장한 소리꾼 장서윤은 조명이 어슴푸레 들어온 가운데 무대 왼쪽의 창가에 기댄 채 ‘충만한 힘’과 ‘시’ 등에 들어있는 네루다의 시어들을 일부 발췌해 재구성한 내용의 창을 한다.

“생명줄들이 불타는 바다/아버지일까 어머니일까/어떻게 싹텄을까…나를 둘러싼 죽음 속에서/내가 가고 또 간다는 것/내가 노래하고 또 노래한다는 것/설명할 길이 없다.”

이어 양종욱 배우, 소리꾼 유태평양, 양조아 배우가 한 사람씩 또는 조를 지어 등장하면서 흡사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것 같은 시구를 소리로 또 낭송으로 전한다. 이들의 노래와 무대·조명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몽환적이다. 파티가 끝나고 모든 것이 사라진 후 느낄 수 있는 허무감이나, 외로움, 상실감, 더 나아가 죽음의 그림자 같은 것이 어른거리며 공간에 머무르고 있는 듯하다.

창극 '시'의 한 장면. ⓒ국립극장
창극 '시'의 한 장면. ⓒ국립극장

 

중요한 오브제 중의 하나는 풍선. 언젠가는 사라지고 마는 것을 표현한 오브제다. 조명을 통해 무대 벽에 짙게 드리워진 풍선의 그림자 이미지는 강렬하다. 양종욱 배우가 처음에 쓰고 나온 토끼 탈이나 나머지 출연진의 붉은색 점퍼, 연두색 상의, 흰색 가발, 선글라스 등 원색 의상도 몽환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이 누군가의 꿈속 이미지인지, 현실의 움직임인지도 모호하다. 후반에 두 명의 배우들이 쓰고 있던 토끼 탈이나 가발 등을 벗어버리는 장면은 결국 이들이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4명 출연진이 함께 “안녕, 안녕, 한곳에서 다른 곳에게 안녕…” 등의 노랫말을 담은 ‘안녕’이라는 제목의 창으로 마무리한 것이 여운을 남긴다. 이 창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 사물, 공간, 기억, 순간순간들에게 아주 정성스럽게 작별을 고하는 마음을 담은 네루다의 시 '작별들'의 일부가 노랫말이다.

국립창극단의 신창극 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인 ‘시’는 스토레텔링 없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조합된 ‘창극 아닌 창극’이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는 있다.

창극 '시'의 한 장면. ⓒ국립극장
창극 '시'의 한 장면. ⓒ국립극장

“우리가 지금 뭔가 열심히 만들고 잡으려 하는 것들이 언젠가는 공기 중에 흩어질지 모릅니다. 살고 죽고. 피어나고 사라지고.… (창극 ‘시’는) 완전히 독립적인 에피소드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안에는 어떤 것이 피어나고 소멸하는 것을 바라봤을 때의 감각이 일관되게 들어 있습니다.”

네루다의 작품 중에서도 생의 순간을 담고 있는 시들을 선택해 극본을 만들었다는 박지혜 연출의 말이다. 작품의 작창 작업은 유태평양과 장서윤 등 2명의 출연진과 또 다른 소리꾼 이자람이 함께 했다.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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