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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누구나 그렇듯 마음이 먹먹한 기분을 느낀다. 전국을 비탄과 허무감에 빠지게 한 대구지하철 참사는 사람들의 넋을 빼놓은 것 같다. 너무나 많은 기가 막힌 사연들 중에 우리의 마음을 더욱 뻐근하게 하는 것은 그 긴박한 상황 속에 남긴 사랑의 인사들이다. 숨도 쉬지 못하게 유독가스가 차 오는 차 안에서 죽음을 예감한 이들의 머리에 떠올랐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집어 들었을 핸드폰….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그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사랑을 전하고 확인하는 것들이었다.

“이제 난 죽을 것 같아요. 사랑해요”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미안해요.”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게 하는 그들의 인사는 잠시의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인생사지만 그래도 사람사이의 통로라 할 수 있는 사랑은 언제까지나 이어져 갈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도 유인 우주선 컬럼비아호가 지구로 귀환 중에 공중폭발을 해 그 승무원들이 다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들이 남긴 마지막 인사

뉴스위크지에 실린 그들의 환한 얼굴을 보며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과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겼을 마음의 인사를 생각하면서 울컥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야 하는, 그리고 떠나 보내야 하는 사람들의 비탄을 마주 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사랑과 인생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가진 사랑과 성의 색깔은 이 세상 사는 사람 수만큼 많고 다양한 모습이란 걸 이제야 깨닫는다. 이렇게 나이가 들고야 사랑의 여러 가지 다양한 색깔을 인정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사랑은 그저 순수하고 무채색이기까지 하다면 어떤 사람이 하는 사랑은 너무나 집착뿐이어서 옆에서 지켜보기만도 숨이 막혀옴을 느낀다.

또 어떤 사랑은 애절하다면 어떤 사랑은 너무나 노골적이고 섹시하다. 하지만 어떤 사랑이든 그것은 사람들이 하는 사랑의 모습이다. 때로 어설프고 때로 잔인하고 때로는 사람을 울게 만든다.

함께 하지 못해도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하고 그 에너지는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되기도 한다. 물론 사랑 때문에 한번뿐인 인생을 끝내기도 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힘일 수도 있고 그것이 사랑 자체가 아니라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에너지를 동력으로 해 인생을 잘 살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따뜻해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음만으로도 인생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래 전에 우연히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사랑의 이야기를 읽었었다. 중세를 휘어잡았던 강력한 가톨릭 정서 안에서 그들은 수도원의 수사와 수녀로 만났다. 서로 사랑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사랑했다. 우리가 사랑을 선택하지만 때로는 사랑이 우리를 선택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했던 수사와 수녀로서 그들은 만났지만 인간인 서로에게 더 끌렸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건 사랑을 시작했다(하기야 처음에는 그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열정 때문에 목숨을 걸게 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겠지만).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수도원의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래서 그들은 헤어져야 했다. 다시는 둘을 만나게 하지 말자고 수도원은 결정했고 둘은 이별을 통고받았다. 두 사람이 헤어지는 날 떠나는 파올로를 프란체스카는 배웅했다.

수도원 밖은 혹풍이 부는 겨울이었고 눈과 바람으로 너무나 황량한 모습이었다.

마음이 너무나 아파서 입을 열 수 없었던 프란체스카가 파올로에게 묻는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파올로가 대답한다.

“다시 꽃이 피고 따뜻한 바람이 불면.”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대답하는 파올로도 듣는 프란체스카도 알고 있었다. 다시는 둘이 만나지 못하리라는 걸. 그래서 사랑하는 이의 체온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라는 걸.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파올로의 간절한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수도원 밖의 정원에는 훈풍이 불고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헤어짐이 만남으로 행복한 결말이 나진 못했지만(때로 자연보다 몰인정한 것이 사람의 성정이니까).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너무나 마음이 아파왔던 기억이 있다. 뜨거운 열정과 폭풍우 같은 죽음으로 끝났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보다 이들의 절제하고 억제하는 입술을 깨무는 사랑이 너무나 애절해서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데 지난해 시드니에 갔을 때 시드니의 주립미술관에서 그들을 만났다.

잘 잊어주는 것도 사랑

놀랍게도 시드니 주립미술관 한 회랑에서 커다란 벽을 채운 그림으로 그들의 사랑을 다시 만난 것이다. 까만 바탕의 캔버스 위에 어두운 한 장의 커다란 천으로 몸을 가린 채 창백하기조차 한 나신으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안겨(?) 있었다. 아니 안았으나 안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옆에는 역시 차가운 안색을 한 두 사람의 수도사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쨌든 너무나 예기치 않게 그들의 눈 시린 사랑을 마주하게 된 나는 한나절을 그 그림 앞에서 책상다리를 한 채 보내야 했다. 사랑이란 게 뭔가 생각하며….

우리가 하는 사랑이란 그런 게 아닐까?

어떤 길목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 날카로운 비수에 찔린 듯 상대에게 빠지는 것, 그리고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열정으로 서로를 사랑하기도 하고 상처내기도 하는 것, 더없는 안타까움으로 상대의 존재를 소유하고자 열망하는 것, 그리고 가지는 것, 끝없이 가지고 싶어 욕심내는 것.

그 사랑은 열정이 사그러들면 비로소 성숙해지는 것, 상대를 있는 존재로서 감사하는 것, 그리고 더없는 자비심으로 상대의 행복을 빌어주고,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것. 하지만 사랑이란 이렇게 간절하면서도 때로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할 때도 있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떠나 보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때로 잘 보내주는 것, 잘 잊어 주는 것도 사랑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살아 있으면서 못 만나기도 하고 죽었기 때문에 못 만나기도 한다(무엇보다 인생이 그런 것이고 사랑이 그런 것이다).

그렇다 해도 할 수만 있다면 온몸의 피를 돌려 마음속에 오래도록 그를 향한 사랑의 등불을 켤 수 있기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으나 평생 사랑의 불을 켜두었던 그들처럼.

배정원/인터넷 경향신문 미디어칸 성문화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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