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백남준 작가가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설치작품 ‘올랭프 드 구즈’
고 백남준 작가가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설치작품 ‘올랭프 드 구즈’

‘파리 모던아트 박물관’(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에 가면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이 만든 작품, ‘올랑프 드 구즈’를 볼 수 있다.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맞아 파리시가 백남준에게 부탁해서 만들어진 매력적인 로봇작품이다. 백남준의 걸작을 통해서 우리는 노예제 철폐, 사회적 약자보호, 특히 혁명의 ‘인권선언’에서 제외되었던 ‘여성의 인권선언’을 쓰고 여성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올랑프 드 구즈의 명예를 기릴 수 있게 되었다. 12개의 브라운관을 이용해 사람모양으로 만들어진 로봇은 가슴에 혁명 이념을 상징하는 삼색리번을 달고 예쁜 꽃으로 장식되어 올랑프 드 구즈의 혁명정신을 아름답게 빛내준다. 덧붙여 백남준은 로봇의 몸체에 프랑스 여성, 자유, 진, 선, 미 등의 한자를 그려 그를 프랑스 혁명의 가장 아름답고 진실된 인물로 새겨놓았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에서 올랑프 드 구즈에 대한 인지도는 남성 문인과 혁명가들에 비한다면 매우 미흡한 수준이다. 19세기를 거쳐 20세기 중반이 지나도록 프랑스 남성 역사학자와 저널리스트들은 올랑프 드 구즈를 도덕적으로 왜곡해왔고, 그가 남긴 원고들을 폐기하거나 그가 쓴 소설과 희곡들을 침묵시키면서 문인이기도 했던 올랑프 드 구즈의 정체성을 지워왔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이후 프랑스가 아닌 독일과 미국의 페미니스트 학자들에 의해서 올랑프 드 구즈의 혁명적 활약이 연구되어 출판되면서 그의 저서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오래 묻혀졌던 나혜석이 20세기 후반 점점 인지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그에 대한 반향인지, 프랑스에서는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그에 대한 역사연구가 시작되고 연구논문과 평전으로, 소설과 만화책 등으로 그는 뒤늦게 부활하고 있다.

여성인권선언문을 발표한 올랭프 드 구주. 종국에는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여성인권선언문을 발표한 올랭프 드 구즈.

“여성은 단두대 오를 권리 있다
연단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

프랑스가 일찌감치 올랑프 드 구즈를 알아보고 멋진 소설과 회화로, 조각으로 그의 위대함을 인식시키고 그를 팡테옹에 안장할 수 있었더라면, 프랑스는 전혀 다른 ‘성의 근대사’를 썼을 수도 있다. 오래 잊혀졌던 그는 많이 늦었지만 적어도 1989년 이후 파리 모던아트 박물관에서 백남준의 ‘올랑프 드 구즈’를 통해 혁명적 전위성에 어울리는 모던 아트 작품으로 기념되고 있지만 ‘공화국의 위인’을 안장하는 팡테옹은 지금도 올랑프 드 구즈에겐 문을 닫고 있다.

팡테옹은 본래18세기 중엽 왕권수호를 기원하는 성 주느비에브교회로 지어졌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1789) 이 일어나자 교회의 십자가는 제거되고 1791년 사망한 혁명가 미라보를 안장하면서 지금의 팡테옹(만신전)으로 길을 열었다. 지금은 대통령의 최종결정으로 선택된 인물들을 성대한 국가의식과 함께 그곳에 안장하고 있다. 그런데 혁명이 탄생시킨 팡테옹에 가보면 진정한 혁명에 도달하지 못한 프랑스를 대면하게 된다. 그곳엔 여성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안장된 국가 위인들은 남성 계몽철학자, 문인, 과학자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군부 인물들이다. 공화국이 명예를 기리고 추대하는 인물들은 ‘마치스모(Machismo과도한 우세적 남성성)’로 편향되어 있다. 여성이 사회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2015년 전까지 팡테옹에 묻힌 여성은 딱 2명 뿐이었다. 남편 퀴리와 함께 묻힌 과학자 퀴리 부인, 그리고 추대된 남편의 유언에 따라 함께 안장된 여성이다.

1989년 혁명 200주년을 맞아 한 페미니스트 역사학자가 위대한 혁명가 올랑프 드 구즈의 팡테옹 추대를 강력히 요구했고 2000년대 초엔 팡테옹 앞에서 추대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올랑프 드 구즈는 거부되었다. 공화국의 성차별적 민낯을 더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지 2015년 사회당 올랑드 정부는 두 명의 여성 레지스탕스들을 한꺼번에 팡테옹에 추대했다. 또, 2018년 마크롱 정부는 1975년 낙태를 합법화한 ‘베이법’을 통과시켰던 전 장관 시몬 베이를 남편과 함께 팡테옹에 안장했다. 아직도 단 5명의 여성만이 팡테온에 안장되어 있다.

팡테옹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보수 공사 중인 팡테옹. 프랑스 민중의 얼굴들을 담은 가림막에는 여성들이 가득하지만, 정작 이곳에 안장된 프랑스의 국가적 위인 76명 가운데 여성은 5명에 불과하다. 프랑스 혁명의 페미니스트 혁명가 올랭프 드 구즈를 안장해달라는 요구는 번번이 거절당하고 있다. ©www.paris-pantheon.fr
팡테옹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보수 공사 중인 팡테옹. 프랑스 민중의 얼굴들을 담은 가림막에는 여성들이 가득하지만, 정작 이곳에 안장된 프랑스의 국가적 위인 76명 가운데 여성은 5명에 불과하다. 프랑스 혁명의 페미니스트 혁명가 올랭프 드 구즈를 안장해달라는 요구는 번번이 거절당하고 있다. ©www.paris-pantheon.fr

2015년부터 어렵게 ‘금녀의 집’을 뚫은 세 여성들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2차대전 중 나치의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드물게 생환한 인물들로, 모두 부르주아 가족 배경을 갖고 교육을 잘 받은 여성들이다. 사회규범적 차원에서 남성지배권력을 위협하지 않는 범위에서 강인함과 지성을 인정받은 여성들이다. 이들 모두는 괄목할만한 인물들로 팡테옹에 안장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올랑프 드 구즈의 역사성엔 다가갈 수 없는 개인들이다. 팡테옹을 교회에서 ‘만신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모태적 혁명인물인 올랑프 드 구즈는 팡테옹에 처음 안장된 혁명가 ‘미라보’ 이상 역사적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그런데도 번번히 팡테옹 안장을 거부당하는 그는 누구인가!

마리 구즈는 1748년 프랑스 서남부의 작은 도시 몽토방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17세에 결혼해서 18세에 아들을 낳고 곧 남편이 사고로 죽었는데 남편의 이름을 지워내고 과부의 정체성을 거부한다. 남편의 이름대신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올랑프 드 구즈’로 개명하면서 당시 사회규범을 부정해버렸다. 결혼은 여성의 남성종속을 제도화한 것으로 인식하고 구혼자가 나타나도 ‘결혼은 신뢰와 사랑의 무덤’ 이라며 ‘종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 자신이 욕망하는 삶, 전망하는 바를 스스로 써주고 거기서 받은 역할들을 열정적인 용기와 기백으로 수행하면서 역사적 운명에 다달아 혁명적 삶을 완성했다.

1770년 파리로 이주한 그는 독학으로 계몽철학에 흠뻑 빠졌고 당대 문인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여성현실을 비판하는 자전적 소설들을 썼다. 뿐만아니라 참혹한 고통에 놓인 흑인노예의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면서 노예제도를 고발하는 희곡을 써서 꺽이지 않는 의지로 무대에 올리면서 선구적 노예제철폐 운동을 벌렸다. 혁명이 터지자 혁명의 중심장소로 이사다니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혁명에 던졌다. “여성이 단두대에 올라갈 권리가 있다면 ‘발언대’ (참정권)에 올라갈 권리가 있다”면서 ‘구체제’와 다름없이 혁명기에도 배제된 여성의 동등한 정치권을 강력히 요구했다. ‘혁명’이 무색하게 참정권, 혁명 정부의 직위, 의회와 같은 장소의 ‘발언자’권리등으로 부터 모두 제외된 여성인 그였지만 가능한 모든 혁명의 공간에서 혁명의 성공을 향해 돌진하는 백의종군 병사와 같이 헌신적으로 투쟁했다. 정치 에세이와 팜플렛을 쓰고 자산을 털어 인쇄해서 벽보로 붙이고 뿌려가면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고, 여성발언이 허용된 클럽에서 연설하고 토론했다. 무고한 피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반목하게 된 로베스피에르의 쟈코뱅들에 의해 체포(1793)된 그는 변호인도 없이 재판받고 반역으로 몰려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혁명을 회의하지 않았고 프랑스에게 복수를 부탁했다. 반드시 여성들이 승리하는 날이 온다는 믿음을 남기며, 여성들을 위해 바친 자신의 혁명활동을 기억해달라는 소원을 남기기도 했다.

단두대로 끌려가는 올랭프 드 구즈.
단두대로 끌려가는 올랭프 드 구즈.

올랭프 드 구즈의 자매들
세상을 향해 #미투를 외치다

올랑프 드 구즈는 혁명기 폭력적 급진 남성권력에 맞섰다. 그들을 보복의 피에 굶주린 반혁명적 집단이라고 직격탄을 쏘다가 부당하게 희생되었다. 노예제 철폐론자였던 그는 노예제에 기반한 식민통치를 통해 대자본를 축적하고 이익을 보는 귀족과 부르주아 모두에게 적으로 몰리는 원칙적 혁명가였다. 페미니스트 정치를 실천하면서 혁명정치의 최전선에서 남성권력과 착취자본 모두를 비판하면서 타협없이 사회개혁에 질주하는 올랑프 드 구즈를 단두대로 보내고서야 비로소 침묵시킬 수 있었던 남성 지배권력의 후대들은 올랑프 드 구즈의 환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움츠려들 수 있다. 오늘날 프랑스 국내외를 막론하고 더욱 기념되는 올랑프 드 구즈의 부활을 막을 힘은 없어도 그들은 성대한 국가의식을 받으며 공식적으로 기념될 올랑프 드 구즈의 팡테옹 안장이 불러올 혁명정신의 강력한 전염만은 피할 수 있는 한 막고자 하는 것이다.

2018년 서지현 검사를 비롯, 전 사회지형의 만연한 성범죄 피해자들이 용기를 갖고 가해자들을 지목하고 그들의 처벌응징을 요구하고 나선 행동은 자신의 경험을 사회화해서 사회개혁의 전위에 나선 미투운동이 되었다. 이들은 여성의 정치화에 앞장섰던 올랑프 드 구즈의 쌍둥이 자매들이다. 팡테옹이 아직도 올랑프 드 구즈를 막고 있듯, 사회변혁을 위해서 자신들의 삶을 던져 투쟁하는 여성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왜곡 폄하되고 경멸되면서 사회개혁을 와해시키려는 세력들의 백레쉬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단두대에 오른 올랑프 드 구즈가 확신했듯, 용기 있게 돌진했던 축적된 여성혁명은 불같은 영감을 불러일으켜서 여성들을 반드시 승리로 이끌것이다. 올랑프 드 구즈가 거부당한 팡테옹을 연민할 백남준과 함께, 우리는 양팔을 벌려 혁명의 아름다운 꽃, 올랑프 드 구즈, 그를 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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