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경 칼럼] 시어머니와의 연대
[정진경 칼럼] 시어머니와의 연대
  • 정진경 사회심리학자
  • 승인 2019.01.24 15:24
  • 수정 2019-01-25 1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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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도 늦지 않다
이야기할머니로 자원봉사
일본어 번역작가로 활동하며
문학가 꿈 이루고
노년의 삶 개척
정진경 사회심리학자 

오래 전 어느 날, 시어머니와 식탁에 앉아 여자로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가 한숨과 함께 “얘, 나는 너희 어머니가 부럽다”고 하셨다. 내 친정 어머니는 별 고생 없이 사시지 않았냐는 뜻으로 해석하고, 우리 엄마도 별별 고생 다 많으셨다고 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그 시절에 태어나 고생 안 한 여자가 어디 있니. 그래도 너희 어머니는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일도 하셨잖니!”라고 하셨다. 그때 알았다. 평생 공부가 더 하고 싶으셨구나!

나의 시어머니 이학선 선생은 1923년에 태어나셨다. 정신여고를 다니셨으니, 당시로는 드문 신식교육을 받으셨다. 졸업 후 학교 선생님을 시작하셨으나, 1940년대 초반 일제가 극악을 부리던 때라 정신대를 피해 집안에서 얼른 결혼을 시켰다. 스물하나에 첫딸을 낳고,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전후 복구의 어려운 시기에 사남매를 낳아 키우느라 바삐 사셨다.

어머니의 소녀시절 꿈은 문학가였다. 연세가 들어 등이 굽고 눈이 어두워지셔도 늘 뭔가를 읽으셨다. 신문, 일본 시사 잡지, 박완서 소설, 아들 며느리가 가져다 드린 책, 무엇이든지. 그러나 꿈에는 다가가지 못하셨다. 글을 써야 문학가다. 그때 이미 일흔이 넘은 어머니의 어린 시절 꿈 이야기는 가슴 아팠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상실감에 어쩔 줄 모르셨다. 가족을 위해서 평생을 사셨는데 돌보아줄 가족이 없어지니, 어디에 관심을 두고 무슨 일로 하루를 보낼지 막막해하셨다. 어머니의 관심은 우리를 향했고 나는 부담스러웠다. 어머니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어머니가 좋아하실 사회적인 일을 마련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책 많이 읽고 이야기 잘 하시는 특기를 살려, 남편이 관여하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이야기할머니’로 자원봉사하실 자리를 연결해드렸다. 어머니는 전래동화, 세계명작동화를 여러 권 사다놓고 연구에 들어가셨다. 권선징악의 가치관이 투철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줄거리나 결말은 적절히 바꾸기도 하셨다. 일주일에 한 번씩 곱게 차려 입고 어린이집에 가셨다. 워낙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하시고 표정연기도 풍부해서 아가들에게 인기가 폭발했다. 어린이집 입구에 들어서시면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이야기할머니!”하고 매달렸다. 노년의 건강문제에도 불구하고 여러 해를 꾸준히 하시다 보니 신문이나 잡지에서 가끔 인터뷰를 하러 오기도 했다.

우리가 어머니에게 권한 일 또 한 가지는 번역이었다. 일본 책 읽기를 놓지 않으셔서 어머니의 일본어 실력은 놀라웠다. 책 번역을 하시면 문학의 꿈도 어느 정도 이루실 것 같았다. 처음엔 그걸 내가 어떻게 하냐고 마다하셨지만, 일단 시도해 보시라고 강권하니 조금씩 해내셨다. 옛날식 표현과 맞춤법은 젊은 번역가가 교정해주어 몇 년에 걸쳐 일본 책 여러 권을 번역해내셨다. 공동체 실험에 관한 수기, 연령별 육아책 시리즈, 어린이 그림책, ‘두근두근 우타코씨’라는 소설이 출판되었다. 백발의 할머니가 거실 탁자 앞에 단정히 앉아 돋보기 쓰고 책과 사전, 대학노트를 놓고 번역에 열중하시는 모습은 그림 같았다. 지금은 돌아가신지 여러 해라 그 모습이 그립다.

한 번은 “너희들이 나를 데리고 실험하는 거지?”하고 웃으셨다. “어머니, 그런 점도 있는데요, 꿈을 이루시는 걸 보고 싶었어요. 이젠 번역작가시잖아요”하고 같이 웃었다. 시어머니와 사이가 엄청 좋았다고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일이 어찌 없었겠나. 내내 동의할 수 없는 것도 있었고, 내가 나이 들고 보니 예전에 좀 더 잘하지 못해 후회되는 것도 있었다. 다만 내 마음에 뿌듯한 한 가지는 어머니가 여자라서 접어야만 했던 꿈을 페미니스트로서 이해하고 지지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어머니는 그 진심을 받아 주시고, 노년의 삶을 멋지게 개척해나가셨다. 우리는 여성으로서 연대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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