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취재] 가정폭력

성공한 여성들 가정폭력 드러내기 더 꺼려

“때리는 사람이 부끄러워 할 일이지 맞는 사람이 창피한 게 아닙니다.”

최근 가정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의 경우 오히려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학력이 높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여성들 중에도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여성들이 많지만, 대부분 가정사가 공개되는 것을 꺼려 속으로만 앓고 있는 것이다.

서울여성의전화 이문자 여성인권상담 소장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여성일수록 파장이 클 것을 우려,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서야 가정폭력 사실을 드러내는데 가정폭력 신고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특히 남성의 권리가 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더 인정되고 있는 우리사회의 관행 상 가정 내 폭력을 감출 경우 폭력의 정도는 더욱 심해지는 게 일반적인 경향.

이 소장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은 이름을 밝히거나 사례가 공개될 것을 우려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상담을 시작했다가도, 막상 상담을 시작하려 하면 자료 자체를 폐기해 줄 것을 요구한다는 것.

특히 여성사업가 등 왕성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30~40대 여성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고 한다.

이연희(가명, 38)씨의 경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일노동직에 종사하는 남편에 비해 이씨는 평소 페미니스트 동호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호주제 폐지 문제에 대해 여러 매체에 기고하는 등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한 여성이다. 그런 그가 폭력을 일삼는 남편과 이혼한 후 자신의 명의로 된 집에서 쫓겨나 친구 집을 전전해야 했다.

이씨가 집을 되찾기 위해서는 경찰과 친구들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 과정을 본지 기자가 동행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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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자신의 집을 찾기 위해 힘겨운 발걸음을 한 이씨가 남편을 내보낸 후 힘이 빠진 듯 벽에 기댄 채 앉아 있다. <사진·이기태>

이연희(가명. 38)씨가 집에 들어간 것은 실로 석달 만이었다. 돌이 갓 지난 어린 아들의 얼굴이 내내 눈에 어른거렸지만 시도 때도 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전 남편 때문에 집을 나가 있었던 지난 3개월 동안 집을 찾지 못했다는 이씨.

자신의 명의로 된 집임에도 불구하고 일곱 살 난 딸과 함께 친구의 집을 전전했던 그는 한 지붕 아래 있기조차 두려울 정도로 폭력을 일삼았던 전 남편을 다시 만나 집을 나가줄 것을 요구해야만 하는 현실이 서럽기만 하다. 일곱 살 난 딸과 친구의 집을 전전하면서도 1백여만원이 넘는 집세와 공과금을 꼬박꼬박 내왔다는 이씨가 경찰에 신고한 후 ‘용기를 달라’며 기자와 함께 경기도 지역의 집을 찾은 것은 지난 14일 오후 8시. 첫번째 남편과 사별 후 다시 재혼한 이씨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다시는 가정을 깨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임신중의 폭력까지도 참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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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남에 지속적으로 폭행 당한 이씨

그런 그가 이혼한 후에도 자신의 집에서 나가지 않은 채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전 남편에게서 집을 되찾기 위해 힘겨운 발걸음을 하게 된 것은 ‘딸에게 폭력을 물려주기 싫어서’였다. 이씨의 사연은 평소 페미니스트 관련 동호회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는 후배와 동료들에게도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일’로 인식돼 이날 6명의 지원군이 자신의 아이들까지 데리고 걸음을 함께 했다. 평소 ‘호주제 폐지’와 ‘성평등 부부’에 대해 활발히 토론하고 여러 곳에 글을 기고하고 있는 그가 남편에게 맞고 지냈다는 사실은 해독 불가능한 사안처럼 보인다.

이씨와 함께 집을 찾은 후배 전모씨는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상담을 해주던 당당한 모습의 언니가 이렇게 살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전씨는 또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며 “언니가 재혼하고 다시 이혼했다는 사실만 알았지 이 지경에 이르렀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숨을 쉰다.

“당당한 여성일수록 힘겨운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현실을 몸소 체험하며 가정폭력을 단순하게 가정 내의 폭력으로만 보는 선입견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실감했다”고 말하는 이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사업에 실패해 노동일을 하고 있는 전 남편과 살면서 집안을 혼자 힘으로 꾸려왔다.

전 남편의 빚보증을 거절하고 시집에 생활비를 적게 보내면서부터 폭력에 시달렸다는 그는 “둘째를 배고 있었을 때도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도록 주먹을 휘두른 남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고 분을 삼켰다.

“TV에 나올 때마다 잉꼬부부라는 걸 과시했던 이경실씨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사실 임신 전후 남편에게 맞으면서도 겉으로는 정말 행복하게 사는 부부처럼 지내면서 ‘나만 입을 다물고 살면 가정이 깨지진 않겠지’하는 최면을 걸었지요.”

가택무단침입으로 남편을 신고하고 남편이 집을 나갔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기자와 함께 택시를 타고 가면서 절절히 털어놓는 그의 말들은 개그우먼 이경실씨의 사례처럼 소위 ‘잘나가고 당당한’ 여성들의 가정폭력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었을 때 이씨의 전 남편은 짐을 싸지 않고 있었다. 이씨가 집안으로 들어왔어도 본체 만체 했던 그는 경찰이 와서 “집 명의자가 퇴거요청을 하면 나가야 한다”며 나가줄 것을 종용하자 “이혼은 했지만 같이 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참았던 설움이 북받쳤는지 “돈 안 준다고 때릴 땐 언제고 부부행세냐”며 울분을 토했고 이씨의 전 남편은 “이 여자가 평소에도 정신이 이상했다”고 경찰에게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됐다. 결국 경찰의 퇴거명령에 못 이겨 전 남편은 시어머니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가고 이씨는 어린 아들의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아쉬움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신고 꺼려 극단적 상황까지

최근 가정폭력 상담이 급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이 이씨처럼 용기를 내서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들은 처음 상담을 요청했다가도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여성의전화 이문자 여성인권상담 소장은 “학력이 높은 여성이건 낮은 여성이건 때려도 되는 이유란 없다”며 “특히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여성일수록 파장이 클 것을 우려, 수치심 정도가 높아져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서야 가정폭력 사실이 드러나는데 가정폭력 신고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이 소장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은 이름을 밝히거나 사례가 공개될 것을 우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시작을 하다가도 막상 상담을 하려 하면 자료 자체를 폐기해주길 원한다”며 “여성사업가들이 늘면서 30∼40대에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박소현 상담원은 “많이 배우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여성들도 무수히 맞고 살지만 이를 사회적으로 알리는 여성은 가정사가 모두 공개되는 등 부담을 안게 된다”며 “특히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남성의 권리가 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더 인정받고 있어 이를 숨길 경우 폭력의 정도가 심해진다”고 밝히고 있다.

학연과 지연이 강하게 작동하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선 억눌림을 분출할 데가 없는 ‘소외된 남성’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분석도 나온다. 때려도 별 문제가 안 되니까 만만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때문에 가정폭력을 처벌하는 법을 현실화해서 아내구타가 즉각적인 이혼사유가 되고 경제적 능력이 없는 여성도 이혼해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재 가정폭력특별법은 경찰이 가정폭력을 인지했을 경우 수사해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이 실제로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실제로 이경실씨 사건에서도 경찰은 남편 손씨의 폭력사실을 인지한 후 즉각 체포해 수사할 수 있었으나 이씨가 처벌을 원한다고 밝힌 후에야 움직였다. 이는 이경실씨나 이씨의 경우처럼 ‘가정해체’와 ‘전과자’가 될 남편이 걱정되기 때문이나 전문가들은 참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며 한번의 폭력이 더 많은 가정문제를 낳는다고 강조한다.

서울여성의전화 이문자 여성인권상담소장은 “경찰이 법대로 가정폭력 사범을 처벌하고, 또 때리면 즉각 이혼이 가능하게 법을 고친다면 남성들은 때리고 싶어도 못 때리게 될 것”이라며 “이씨 사건에서도 경찰이 즉각 남편을 수사해 처벌했더라면 대중적인 계몽효과가 컸을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가정폭력은 부부싸움 아닌 범죄행위

이소장은 “때리는 남편이 부끄러워 할 일이지 맞는 여성이 창피할 일이 아니다”라며 “경제권의 이동에 따른 남성의 열등감이 폭력으로 표출된 사례는 점점 늘고 있으나 정작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의 상담건수는 극히 적어 피해여성들의 인식전환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일단 남편이 폭력을 행사하면 1366 전화를 이용, 전국의 가정폭력상담소와 상담을 하는 등 여성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문은 ‘여성들이 몰라서 신고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신고해도 해결을 기대할 수 없어 신고하지 않는다’는 현실론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힘을 잃는 게 사실이다. 가정폭력을 ‘집안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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