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속으로] 암적색 밑칠에 배어 있는 열정과 어둠
[공연속으로] 암적색 밑칠에 배어 있는 열정과 어둠
  • 강일중
  • 승인 2019.01.14 11:25
  • 수정 2019-01-16 15: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존 로건 작/김태훈 연출의 ‘레드(Red)’
연극 ‘레드’의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레드’의 한 장면 ⓒ강일중

유명 화가의 삶이나 그림은 종종 작가들에게 깊은 영감의 원천이 된다. 이들의 삶과 작품을 다룬 연극이 관객에게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일도 적지 않다. 피카소를 거쳐 간 여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입체파 거장의 삶을 조명한 ‘피카소의 여인들’(브라이언 맥아베라 작)이 그 한 사례. ‘우리, 테오와 빈센트 반 고흐’(장 므노 작)는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가 주고받았던 편지를 바탕으로 고흐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병적이며 시적인 시선을 정교하게 그렸다. 국내 작품도 여럿이다.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천재 화가 이중섭의 인간적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낸 ‘길 떠나는 가족’(김의경 작),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 주인공인 가무악극 ‘화선, 김홍도’(배삼식 작) 등이 대표적이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 위에 올려진 ‘레드(Red, 연출 김태훈)’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2-1970)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화가나 그림을 소재로 한 여느 연극과는 달리 이 작품은 그의 예술철학과 예술사조 간의 충돌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또 그의 삶 전반보다는 그가 뉴욕 맨해튼의 최고급 레스토랑 내부에 걸 벽화를 엄청난 대가를 받고 그려주기로 했다가 일방적으로 계약파기를 선언한 일화를 중심으로 극이 진행된다.

1958년 당시 미국 미술계에서 큰 화젯거리가 되었던 그의 약속불이행 배경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레드’의 작가 존 로건이 그 배경을 상상한 결과와 실제 생전에 마크 로스코가 했던 이야기들을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 작품의 내용이다. 2인극으로, 마크 로스코와 가공의 인물인 젊은 조수 켄만 출연한다.

연극 ‘레드’의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레드’의 한 장면 ⓒ강일중

시공간은 1958년, 로스코가 포시즌스 레스토랑의 벽화 작업을 하는 맨해튼 작업실이다.

극의 재미는 ‘피라미’ 화가지망생 켄이 화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로스코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대립상황까지 치닫는 것을 보는 데 있다. 켄은 특히 미술세계의 상업성을 경멸하는 로스코가 갑부들만 갈 수 있는 포시즌스에 걸 벽화를 그리고 있는 이유를 캐묻는다. 또 그가 신진 세대에 대해 가진 편견을 정면으로 공박하기도 한다.

켄은 로스코와 동시대 화가 잭슨 폴락을 각각 이성과 지성을 상징하는 아폴론과 야성의 디오니서스적 인물로 비교하면서 로스코 내면의 길들지 않은 감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인물로 부각된다. 켄의 자극에 처음에는 분노했던 로스코는 점차 자신이 켄으로부터 거친 야성을 수혈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가가 로스코 내면의 지성 반대편에서 꿈틀거리는 야성을 켄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해 표현한 것이라는 느낌도 든다.

연극 ‘레드’의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레드’의 한 장면 ⓒ강일중

또 하나 작품 속에서 뚜렷이 부각되는 것은 세대 간의 충돌이다. 로스코는 켄에게 “이젠 아무도 입체파 그림을 그리지 않아…자식은 아버지를 몰아내야 해. 존경해야 하지만 살해해야 하는 거야”라며 ‘살부(殺父) 의식’을 자신 있게 드러낸다. 그러나 결국 로스코 세대 역시 상업적 소재를 작품 속에서 활용한 앤디 워홀 같은 팝아트 세대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며 켄은 팝아트를 경멸하는 로스코에게 그러한 변화를 일깨운다. 이어 로스코가 예술의 상업성을 비난하면서도 대형 고층 빌딩 내 최고급 레스토랑에 그림을 그려주기로 한 것 자체가 상업성에 물든 것이라며 그의 위선성을 꼬집자 자극받은 로스코는 결국 벽화를 포시즌스에 보내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동굴 같은 분위기의 스튜디오 같은 무대에서 물감을 만들고, 캔버스를 짜는 과정 등이 두 배우에 의해 재현되는 것을 보는 것이 흥미롭다. 중반에 축음기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임프레사리오’ 서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로스코와 켄이 무대 위에 세워진 캔버스에 붓으로 암적색의 밑칠을 힘차게 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다. 암적색 밑칠의 캔버스에는 화가의 열정과 내면의 어둠이 짙게 배어 있다. 로스코가 좋아했다고 하는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등의 음악을 여러 곡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연극 ‘레드’의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레드’의 한 장면 ⓒ강일중

미술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관객의 깊은 미술적 조예를 전제로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른다 해도 극을 따라잡는 데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아주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연극이다.

중견배우 강신일과 정보석이 로스코 역으로, 신진인 김도빈과 박정복이 켄역으로 좋은 연기를 펼친다. 공연은 자유소극장에서 2월 10일까지.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50 (3가 222번지) 골든브릿지빌딩 1층, 9층
  • 대표전화 : 02-318-93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준철
  • 제호 : (주)여성신문사
  • 사업자등록번호 : 214-81-03304
  • 대표이사 : 김효선
  • 발행·편집인 : 김효선
  • 여성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9 여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admin@wome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