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경 사회심리학자 

아파트 관리비 내기를 비롯해 별별 개인적 용무를 다 학과 조교에게 시키는 선배 교수가 나는 무척 못마땅했지만, 나서서 그를 나무라고 조교를 보호해줄 엄두는 비겁하게도 내지 못했다. 나라도 그러지 말자 했다. 바빠서 점심도 못 먹고 책상에 붙어 있던 날, 마침 연구실 조교가 밥 먹고 오겠다기에 살았다 싶어서 올 때 김밥 한 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천원을 건네받으면서 그가 “선생님, 이런 건 아무 때나 시키세요, 사다 드릴게요”하고 순하게 웃었다.

물론 제 선생을 존경해서 그런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나는 아끼는 이 조교를 위해서 아무 때나 김밥을 사다 줄 용의가 없다. 입장을 바꾸어 보면 답은 간단히 나온다. 교수는 대학원생에게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권력을 정당하지 않은 사안에는 사용하지 않으려고 늘 조심했지만, 무심코 권력의 덕으로 편히 지낸 경우도 적지 않으리라.

신입사원은 좋아하지도 않는 팀장에게 커피를 타다 바치고, 과장의 느끼한 유머에 하하 웃어주고, 잠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은 부장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준다. 사람들은 그런 걸 “사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이라고 한다. 이것이 진정 바람직한 사회생활의 학습인가, 아니면 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피해를 입어도 참는 훈련인가?

대한항공에서, 남양유업에서, 미스터피자에서 누군가의 귀한 아들딸이요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고용주에게 물컵으로 맞고, 정강이를 걷어차이고, 인격 모독을 당해도 참았다. 업무에서 더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고, 승진에서 누락되지 않으려고, 직장에서 해고당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참았다. 어떻게든 저항해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사회생활이라고 해보면 그게 어디 쉽던가. 상사들은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할 필요조차 없다. 그럴 힘을 쥐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힘을 위력(威力, 상대를 압도할 만큼 강하고 큰 힘)이라 한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인간관계 내의 권력을 몇 종류로 구분하는데, 위력은 그 중 “강압적 권력”의 한 형태로 상대방을 처벌할 수 있는 힘이 막강한 경우에 발생한다. 잠시의 침묵이나 흘깃 보는 눈짓 하나만으로도 상대를 얼어붙게 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 구체적 협박 없이도 위력은 늘 암시되어 있으므로.

국회의원의 말단 행정비서로 일하는 한 여성은 모든 말에 “네, 알겠습니다”로 대답해야 했다고 기고문에서 밝혔다. 의원은 서슴없이 인격의 밑바닥을 보이며 갖은 추태를 다 부렸고, 위력에 눌린 그는 공포로 몸이 굳고 수치에 떨고 불면증이 생겼다. 심지어 이유 없이 화풀이를 당해 울면서도, 울어서 죄송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트라우마가 쌓여갔다. 한데 그것도 직장이라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고(인터넷 여성신문, 2018.9.11).

수행비서 성폭행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항소심 공판을 앞두고 21일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대위 회원들이 피켓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수행비서 성폭행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항소심 공판이 열린 12월 21일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대위 회원들이 피켓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 1심 재판부는 “위력은 있었으나 행사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위력은 존재가 곧 행사다. 따라서 그 말은 자체 모순이다. 재판부는 또 김지은씨가 충분히 저항하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위력이란 그 정의상 상대를 압도하여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다. 유력 대선주자인 도지사가 문자 메시지로 “맥주”나 “담배”라고 보내면, 24시간 휴대폰을 받아야 했던 수행비서는 한밤중에도 그걸 사들고 호텔 방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안희정 사건을 비롯하여 숱한 미투 사건, 갑질 사건에서 위력이 작용했는가를 판단하려면, 약한 자,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아야 진실이 보인다. 위력이란 그런 것이다. 2심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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