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의 피나는 노력과
추한 가부장제에 대한 자괴감,
다른 관점·방식으로 젠더폭력에
저항하는 청년세대의 등장이
거대한 #미투 물결 만들어내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여성신문이 선정한 『세상을 바꾼 101가지 사건』의 마지막을 ‘시민들의 미투 지지 동참과 안희정 성폭력 사건 1심 무죄 판결’이 장식하면서 2018년은 막을 내렸다. 전자와 후자는 매우 다르면서도 같은 흐름이다. 성평등 사회로 나아가려는 움직임과 이를 막으려는 대응이라는 점에서 우선 다르다. 그러나 미투운동의 거대한 흐름을 이루는 과정 중 하나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렇게 묘한 지점에서 국가의 역할을 생각해 보자.

2018년 #미투운동은 그 어느 국가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폭발적으로 전개됐다. 본래 운동이 시작된 미국에서도, 이른바 캣콜링(catcalling)같은 길거리 성희롱을 처벌하는 입법 개정을 한 프랑스에서도 #미투와 함께 하는 시민의 거대한 분노를 한국에서처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왜 그럴까?

첫째, 한국 여성운동의 피나는 노력의 성과다. 둘째, 촛불혁명을 통해 민주화를 이루어냈다는 자부심에 커다란 상처를 준 가부장제의 추한 모습에 대해 성별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실망감과 자괴감을 가졌다. 그래서 진정한 민주주의 달성에 대한 욕구를 시민사회가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셋째, 기성세대와 완전히 다른 관점과 방식으로 젠더폭력에 저항하는 청년세대가 나타났다. 이들은 남성만을 위해 존재하는 ‘반쪽짜리 국가’라는 도전적 명제를 던지면서 #미투운동의 폭발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축이 되고 있다.

하지만 ‘미투 전문가’라고 #미투운동을 희화화하는 자가 한국사회 주류의 은밀한 심정적 지지를 받고 있는 현실이 그리 쉽게 바뀌진 않았다. 정작 잠재적 가해자로서 남성의 모습을 만드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가치, 그리고 규범에 따른 사회화 과정이 있다. 그러나 가부장제에 눈을 돌리고 성찰적 반성을 하는 움직임이 그리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반면 잠재적 가해자로서 남성을 만드는 책임을 여성이나 여성운동에게 돌리고 이를 ‘여혐’으로 바꾸고 실천한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1심 무죄 판결은 가부장적 구조의 상징 중 하나다. 법률 문구 자체는 누구나 같은 발음으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뜻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법관의 젠더 감수성, 젠더폭력에 대한 이해, 그리고 여론의 동향이 판결 내용을 좌우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코 피해자에게 유리하지만은 않다. 아직도 수많은 무명의 젠더폭력 피해자들이 “#미투운동? 여기까지야!”라는 냉소적 시선을 의식하며 떨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 #미투운동이 2018년 한 해 폭발적이었던 네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차 피해를 제대로 응징하지 못하고 2차 피해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에 대한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관심도 없었던 국가·사회체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에 대한 체계신뢰(Systemvertrauen)가 여성운동을 비롯한 시민사회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상황을 높은 수준의 젠더 감수성으로써 대하고 2차 피해를 방지할 수 있는 경찰, 검사, 법관 개개인의 존재에 대한 신뢰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다. 당연히 그들이 구성하는 공권력과 사법체계에 대한 신뢰 수준이 높을 리 없다. 잊어버릴만한 하면 터져 나오는 무대응, 늦장 대응, 2차 피해, 이해할 수 없는 무죄 판결 소식 등은 낮은 수준의 체계신뢰를 강화할 뿐이다. 그러니 여성운동과 시민들은 길거리로 나서게 된다. 정부 청사, 법원, 경찰서 앞에서 피켓을 들 수 밖에 없다.

2018년 국가는 ‘범정부 성희롱·성폭력 및 디지털 성범죄 근절 추진협의회’를 구성해 비로소 국가 체계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는 첫 발을 떼었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그래서 기다릴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느긋할 수 있는 여유도 없다. 2019년에 국가와 여성운동, 시민사회가 더욱 머리를 맞대고 협력을 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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