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경 작, 이은준 연출의 연극 ‘분노하세요!’

블랙코미디 ‘분노하세요!’의 한 장면. ⓒ강일중 제공
블랙코미디 ‘분노하세요!’의 한 장면. ⓒ강일중 제공

분노와 비명. 자신을 약자나 소외자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에서 울분은 거세지고, 단말마적 외침 소리는 커지게 마련이다. 분노를 소재로 한 연극들이 요즘 잇따라 나오고 있는 것은 부정적인 방향으로의 사회변화에 대한 일종의 경고 메시지로 읽힌다.

두 해 전 발표된 ‘비명자 2’(이해성 작/연출)는 사회 안에서 외면 받는 개인의 분노와 고통이 작품의 주제였다. 중요한 특징은 설정이 아주 비현실적이었으며, 잔혹만화 같은 연극이었다는 점이다.

극중 많은 사람은 극한의 고통 속에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아 비명 속에 유령처럼 떠돈다. 정부의 특수요원들은 이 ‘비명자’를 찾아 숨을 끊는다. 비명자가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고스란히 전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사회의 안전과 전체 국민을 ‘고통 바이러스’의 확산으로부터 막기 위해”라는 명분으로 비명자들을 죽인다. 작품은 이어지는 장면들을 통해 “이 비명자는 누가 만들었는가”라고 물으며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는 이 사회의 잔인성을 드러낸다.

이 작품의 미발표 전작이면서 원래는 앞서 공연되었어야 할 ‘비명자 1’은 ‘공연예술 창작산실-올해의 신작’ 프로그램 중 하나로 새해 3월 대학로예술극장 무대에 처음 오르면서 분노와 고통을 소재로 한 연작은 이어진다.

블랙코미디 ‘분노하세요!’의 한 장면. ⓒ강일중 제공
블랙코미디 ‘분노하세요!’의 한 장면. ⓒ강일중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기획한 ‘올해의 신작’ 프로그램의 첫 번째 작품인 ‘분노하세요!’(이미경 작/이은준 연출·2018년 12월 21~30일·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는 분노를 소재로 한 또 한 편의 연극. 이 작품은 ‘비명자 2’처럼 황당한 설정을 통해 사회적 약자의 분노와 고통을 묘사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제목 ‘분노하세요!’는 TV 프로그램의 이름.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분노의 상황을 연출하고, 주인공이 격분의 감정을 가장 폭발적으로, 처절하게 표현한 작품 제작자에게 3억 원의 상금을 주는 서바이벌 게임이다.

연극은 최종 후보인 ‘앵그리 박’, ‘매드 킴’, ‘크레이지 송’ 3인이 각자의 분노 서바이벌 오디션 작품을 선보이고 사회자의 진행 아래 3인 심사위원의 심사평과 시청자 점수의 합산으로 순위가 결정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장면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하나는 생중계되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 다른 하나는 그 방송 속의 분노 서바이벌 오디션 장면, 즉 극중극. 나머지는 담당 PD와 사회자·연기자 간 대화나 스태프의 작업모습 등 세트 밖의 현장 상황이다. 여기에 이 연극의 실제 관객은 때때로 오디션을 현장에서 지켜보는 극중 관객으로 편입된다.

3편의 극중극 장면은 반대편 정당 지지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선거운동원들, 뚜렷한 이유 없이 내쫓길 위기에 몰린 임차 상인, 부자 친구에게 괄시당하는 가난한 고교 동창생 이야기다. 각 에피소드는 극심한 울분의 표현으로 마무리된다.

 

블랙코미디 ‘분노하세요!’의 한 장면. ⓒ강일중 제공
블랙코미디 ‘분노하세요!’의 한 장면. ⓒ강일중 제공

기존 TV방송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내용을 패러디하고 분노 오디션이라는 설정 자체가 황당한 만큼 관객의 웃음을 자극하는 장면이 많다. 그런 가운데 사회적 이슈를 부각하면서 주요 등장인물들이 풍자적인 대사를 끊임없이 풀어내는 블랙코미디다. 3인 심사위원의 코믹한 촌평과 예기치 못한 행동이 이 극의 코미디 성격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작품의 묘미는 관객이 예상 밖의 종합점수 결과와 함께 반전 아닌 반전을 보게 된다는 데 있다. 분노 오디션의 내용이나 순위는 미리 각본이 짜인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회적 약자의 분노에 초점을 맞췄던 연극은 돌연 미디어에 의한 현대사회의 대중조작 이야기로 전환된다. '분노하세요!' 서바이벌 게임의 내용 조작은 그것 자체가 충격적이며 또 다른 울분을 만들어낸다.

마지막 장면의 어두운 조명 속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의 위압적인 목소리는 섬뜩하다.

“이봐 강 피디! 국민이 이 프로그램에서 화를 분출하도록 만들어! 거리로 못나오게. 이건 예능이 아니야. 방송을 넘어서 정치라고, 사회에 분노를 갖지 못하도록 만들어. 분노를 조작해, 분노도 훈련이야, 분노는 정치야!”

 

블랙코미디 ‘분노하세요!’의 한 장면. ⓒ강일중 제공
블랙코미디 ‘분노하세요!’의 한 장면. ⓒ강일중 제공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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