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숙 연출의 연극 ‘마른 대지’

연극 ‘마른 대지’의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마른 대지’의 한 장면. ⓒ강일중

 

조명이 밝게 들어오면서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은 중년의 건물 관리인. 대걸레와 물, 양동이 등을 실은 청소도구 운반기기를 갖고 나타난 그는 피로 흥건한 수영장 라커룸의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청소를 시작한다. 핏물을 대걸레로 훔쳐내면서도 그의 표정은 덤덤하다. 흡사 이전에도 같은 일을 많이 겪었다는 듯. 그가 아무 말 없이 피에 젖은 신문지와 검은 비닐봉지 등을 걷어내는 등 라커룸을 이전대로 말끔히 청소하는 7분 가까운 시간이 연극 ‘마른 대지’(루비 래 슈피겔 작, 윤혜숙 연출)의 ‘사건 없는’ 클라이맥스 장면이다.

원명이 ‘Dry Land’인 이 작품은 혼자서 낙태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한 고등학교 수영부 학생 에이미와 유일한 낙태 조력자인 친구 에스터를 통해 10대 소녀들의 불안, 고립감, 그리고 좌절을 그린다. 주인공도 등장하지 않고 대사도 전혀 없는 극 후반부의 라커룸 바닥청소 장면은 그 주제를 다른 어느 순간보다 더 명확하게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이미지다.

연극 ‘마른 대지’의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마른 대지’의 한 장면. ⓒ강일중

에이미는 임신 10주째. 하지만 부모에게는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고 남자친구는 임신 사실조차 모른다. 친구들은 신뢰할 수 없다. 합법적으로 낙태하기 어려운 상황인 에이미는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여러 방법을 동원해 혼자 낙태를 하려 한다. 그가 셀프 낙태 조력자로 고른 사람은 같은 수영부 선수인 에스터. 에스터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에이미가 도움을 청한 것이 약간 어리둥절하지만, 이내 필사적으로 친구를 돕기 시작한다. 고립감과 고통과 불안감에 떨던 에이미는 결국 에스터의 도움으로 수영장 라커룸에서 낙태를 하게 된다.

연극은 에이미가 자기 배를 에스터에게 힘껏 치라고 부탁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에스터 역시 낙태 조력은 난생처음 해 보는 일이다. 두 소녀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를 온몸으로 겪어낸다. 연극은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에이미를 피해자로 동정하지도 않고 극 속에 등장하지 않는 남자친구를 가해자로 만들지도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결과와 예기치 못했던 일을 불안초조감 속에서도 스스로 힘으로 헤쳐 나가는 소녀들의 모습을 그린다.

연극 ‘마른 대지’의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마른 대지’의 한 장면. ⓒ강일중

작품이 흡인력을 발휘하는 것은 두 친구가 조력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존심 대립, 질투 등 심리적 갈등과 재화합의 국면을 매우 섬세하게 대사와 행동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는 에이미의 가장 친한 친구(베프)이며 같은 수영부 선수인 리바가 끼어들면서 삼각관계의 묘한 견제와 끌림과 배척 심리를 자극한다. 한순간 에이미는 에스터를 향해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고 몰아세운다. 에스터는 그런 친구의 돌연한 태도에 배신감을 느끼며 우연히 만난 대학생 빅터에게 에이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다가 전혀 몰랐던 놀랄만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친구들 간의 매우 복잡 미묘한 심리 움직임이 작품의 저변에 깔려 있다.

작품에 흥미로운 부분이 또 하나 있다. 요즘 10대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사춘기의 성적 호기심과 열등감, 성적 접촉을 통한 사랑의 방식과 그 문제와 관련해 또래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등 소녀들의 성 심리를 대사 속에 감각적으로 잘 녹여낸 점이다. 에이미는 대사 중에 사디스트, 마조히스트, 살인자, 시체성애자, 동물성애자가 등장하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연극 ‘마른 대지’의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마른 대지’의 한 장면. ⓒ강일중

희곡을 쓴 루비 래 슈피겔(Ruby Rae Spiegel․25)은 미국의 신진작가로 2014년 ‘마른 대지’가 뉴욕 맨해튼의 히어아트센터에서 공연되면서 이름을 얻었다. 이 작품은 영어로 쓰인 여성극작가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한 권위 있는 수전 스미스 블랙번 상의 최종 후보로 올랐었다. ‘마른 대지’는 지난해 7월 두산아트센터가 ‘DAC 희곡리서치’를 통해 번역, 소개했었다.

공연은 대학로 소극장 예술공간혜화에서 12월 30일까지.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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