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경 사회심리학자 

 

좋은 글을 읽다가 한 구절에 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인데, 저명한 문학평론가가 돌아가시고 그 제자가 신문에 올린 추도사였다. 스승에 대한 절절한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담은 격조있는 문체가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한 구절이 마음에 걸렸다. “공부를 하려는 자라면 모름지기 집과 부엌을 떠나야 한다.”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하며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 말이 왜 그렇게 걸릴까, 내가 문맥을 잘 못 이해했나 하고 거듭 읽어 보았다.

훌륭한 글에, 그것도 스승에게 바치는 추도사에 고작 한 구절을 가지고 저자에게 뭐라 할 수는 없었으나, 영 마음에 걸려 내려가질 않았다. 결국 그 글을 공유한 내 페친(페이스북 친구)에게 댓글을 달았다. “아이 어머니는 어떻게 공부할 수 있을까요?”하고 저자에게 질문하고 싶다고. 괜한 소리 했나 싶었는데, 그분이 본인도 그 부분이 걸렸지만 전반적으로 이해하기로 했다고 댓글을 달았다. 여성운동에 오랜 시간 힘을 보태온 남성 페미니스트 학자로 내가 존경해온 분이다.

댓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은퇴 후 귀농하여 살림하고 농사짓는 남성 페친이 아이 어머니는 공부하기 쉽지 않다, 요즘 해보니 청소, 요리에 하루 해가 다 간다, 농사까지 더해 자신은 연구 포기 상태다 라고 댓글을 달았다. 충분히 공감이 갔으나, ‘그래서 아이 어머니는 공부하기 어렵다’고 결론이 나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못 참고 또 댓글을 달았다. 집과 부엌을 멀리하고 공부하려면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봉사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유한계급에게 그리고 대체로 남자들에게 가능한 일이다, 의식주를 단순히 하고 주경야독한 사람도 있고 유학 가서 아이 키우고 살림하면서 남편보다 먼저 학위를 받은 여성도 있다, 공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있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한 페미니스트 이론가가 완전히 공감한다면서, 페미니스트 입장론이 바로 그렇게 남성 좌파들을 비판하면서 출발했다고 댓글을 달았다. 이렇게 나는 남의 페이스북에 난데없는 페미니즘 논쟁을 일으켰다.

며칠 후 책을 읽다가 나의 체증을 풀어주는 글을 만났다.

“자기만의 방이 없는 내게 거실은 주무대였고, 식탁은 작업대였다. 거기서 아침 먹고 그릇 치우고, 책 보고 점심 먹고, 김칫국물 닦고 글 썼다. 식탁에 앉아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부엌에서 부침개 끄트머리가 지글지글 타고 있으면 잽싸게 뛰어가 부침개를 뒤집고 와서 또 다음 문장을 써내려갔다. 나의 손과 노트북과 식탁과 가스레인지의 협응은 거의 묘기 수준에 이르러서, 부침개를 뒤집는 동안 아이디어가 반짝 떠올라 원고의 제목을 정하기도 했다. 그렇게 부산스럽게 준비한 저녁 먹고서 식탁을 정리하고는, 한쪽에 밀어두었던 책과 노트북을 끌어와서 긴긴 밤을 보냈다. (중략) 밥상에서 밥을 위한 글을 쓰면서 나는 밥의 절실함과 서러움을 배웠다.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을 위해서 운다는 말처럼 배 굶고 아픈 것들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은유, “올드걸의 시집” 중에서)

박완서 선생은 아이 넷을 키우며 글을 썼고, 신영복 선생은 이십 년을 감옥에 갇혀 잡범들과 같이 지내면서 글을 썼고, 박경리 선생은 힘겹게 암투병을 하며 글을 썼다. 힘들게 살며 써낸 그 글들은 얼마나 감동적인가.

공부할 때 아무런 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나도 당연히 인정한다. 버지니아 울프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지 않았던가. 앞치마 풀어버리듯 엄마의 옷을 간단히 벗어 버리고 싶었다는 은유 작가의 고독에 대한 갈망에도 공감한다. 그리고 “공부를 하려면 모름지기 집과 부엌을 떠나야 한다”고 쓴 남성 저자의 말이 가사노동을 하염없이 하다가 지쳐서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백 퍼센트 이해한다고 생각해 본다.

무슨 일인가 해보고 싶은 아이 어머니들, 어려운 여건에서도 공부하고 싶은 많은 사람들이 기죽지 않고, 꿈을 포기하지 말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새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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