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장려’ 패러다임 벗어나
‘삶의 질 향상’ 새 목표로
지속적 노력·실천 뒷받침돼야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12월 7일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모든 세대의 삶의 질 제고 및 포용국가 실현’이라는 제목으로 저출산·고령사회 정책 로드맵을 발표했다. 로드맵은 특히 1~3차에 걸친 저출산 대응정책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로서 의미를 갖는다. 기존 계획에서는 변방의 주제였던 성평등이 정책목표로서 중요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출산장려’라는 개발독재시대식 관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국가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할 뿐, 결혼이나 출산은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 선택으로 남기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성을 아이 낳는 자판기 정도로 취급하는 기존 3차 기본계획에서의 목표 ‘2020년 합계출산율 1.5 달성’을 폐기했음은 물론이다.

삶의 질이 낮으면 가족생활에 대한 욕구도 낮아진다.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한 N포세대론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삶의 질이 좋아진다 함은 물질적 생활수준과 삶에 대한 주관적 만족도가 동시에 높아짐을 의미한다. 부탄의 국민 행복지수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하지만, 선뜻 부탄 모델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이미 높아진 한국사회의 물적욕구 수준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돈을 가져야 만족할지 기준을 정하기 어렵지만, 물적 생활수준을 높이는 노력은 중요하다. 일정 정도 높은 물적 생활수준에 더불어 삶과 관련한 주관적 만족도가 높으면 행복한 상태가 된다.

반면 전자와 후자가 모두 좋지 않으면 ‘박탈’의 상태로 볼 수 있다. 현재 출산 주체로서 한국의 청년여성은 불안한 일자리와 주거 등 문제를 경험하면서도 동시에 성차별로 인한 삶의 만족도 수준도 낮은 박탈의 상황에 있다. 가족생활과 출산은 내 이야기가 아니다. 12·7 로드맵에서 삶의 질 향상과 성평등을 묶어서 정책목표로 설정한 것은 이런 현실에 대한 대응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위기의식의 결과이기도 하다.

김상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7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저출산·고령사회 정책 로드맵’을 발표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김상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7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저출산·고령사회 정책 로드맵’을 발표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아이를 낳는 행위는 이제 더 이상 인생의 자연스러운 경로가 아니라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오는 기획이 되었다. 그리고 낳은 아이는 이제 저절로 성장하지 않으며 가족과 사회, 국가의 공백없는 돌봄과 지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12·7 로드맵에서 저출산 현상의 반전을 순식간에 이끌어낼 수 있는 ‘결정적 한방’을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함께 돌보는 사회 만들기’를 선언했지만, 국공립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눈에 띄게 만들려면 오랜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남성 육아참여 확대를 위한 대책을 내놓았지만, 아이를 돌보기 위해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아빠를 직장에서는 앞으로도 오랜 시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당장 피부에 와 닿지도 않는 ‘삶의 질 향상과 성평등’을 선언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앞으로 이 선언을 지속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과 실천이 따르는지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요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출산장려·저출산 극복’이라는 과거 패러다임을 버리는 로드맵을 발표할 즈음에 국회에서는 여야 합의로 출산장려금 250만원 도입을 시도했다. 다양한 경로의 비판에 직면해 일단 출산장려금 도입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직속위원회에서 성평등을 정책목표로서 결정하는 사이에 여당이 출산장려금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극복 대상은 저출산이 아니라 출산장려의 환상에 빠져있는 기성세대, 특히 기득권 남성집단의 행태이다. 여기에 여야가 따로 없음을 유감스럽게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정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선언한 저출산 대응 패러다임 전환이 범정부적이며 국회가 함께 걸어가는 로드맵임을 확인해야 한다. 게다가 여전히 출산장려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자체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논의할 수 있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상설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 이제야 지도를 손에 쥐었으니 차근차근 먼 길을 가야 할 때이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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