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를 ‘여성’으로 한정한 여성폭력방지법
성폭력 피해자를 ‘여성’으로 한정한 여성폭력방지법
  • 진주원 기자
  • 승인 2018.12.13 13:27
  • 수정 2018-12-13 14: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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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폭력방지기본법이
여성폭력방지기본법으로

여성·남성·성소수자 모두 반발

성범죄 피해자 5~10% 차지하는
남성은 보호·구제서 제외

피해자 지원·예방교육
‘의무’에서 '임의조항‘으로

시행까지 1년, 개념 보완해야
여성폭력방지기본법
여성폭력방지기본법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지난 7일 국회를 통과했지만 여성, 남성, 성소수자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먼저 비판의 목소리를 낸 쪽은 여성단체와 인권단체들이다. 여성만 ‘피해자’로 상정하면서 다양한 피해자들을 배제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어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남성을 차별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요지의 글이 올라와 청원 참여인원이 3만명을 넘었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은 성폭력·가정폭력·성매매·성희롱 등 제각각의 개별 법률로 규율되는 성범죄와 현행 법체계에서 사각지대에 있는 데이트폭력, 스토킹 등을 범죄로 포괄하는 법이다. 지난 2월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이 법의 애초 출발은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사항이었던 ‘젠더폭력방지기본법’이지만, 막상 국회에서 제정된 법은 당초 입법 취지에서 크게 후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발의 단계와 심사 과정에서 계속 의미가 축소되고 훼손되면서 입법부의 수준낮은 젠더 의식의 단면을 드러냈다는 비판도 높다.

대통령 공약에서 밝힌 ‘젠더폭력’의 의미는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성차별과 불평등, 이들에 대해 권력에 기반하여 발생하는 신체적, 성적, 정서적 폭력과 통제, 경제적 피해 등을 포괄한다. 그러나 지난 2월 정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었다. ‘젠더’가 아닌 ‘여성’으로 법안명을 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국회 입법조사처로부터 젠더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합의 된 바가 없고 국어가 아니어서 법명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검토의견을 회신받았다”는 게 정 의원 측의 설명이다. 발의 당시 법안 이름이 젠더에서 여성으로 바뀌면서 법안 내용에서 폭력과 피해자의 개념도 크게 달라졌다고 여성단체들은 반발하고 있다. “젠더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있을 때 젠더폭력, 혐오범죄를 파악할 수 있고, 피해자가 놓인 복합적인 환경과 상태를 고려한 지원 정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 제2소위는 법안을 심사하면서 ‘성평등’이라는 용어를 ‘양성평등’으로 교체했다. 또 ‘여성 폭력’의 정의는 ‘성별에 기반한 폭력’ 대신 ‘성별에 기반한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변경했다. 때문에 성폭력 등의 피해자가 여성으로 한정됐다. 이 때문에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들은 이 법이 “(성별에 기반한) 폭력이 ‘왜 발생하는가?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하는가’의 문제에 주목하지 않고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누구를 지원해야 하는가?’로 초점이 맞춰졌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법적 개념은 불평등한 젠더 구조에서 발생하는 여성폭력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여성이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문을 좁히고 선별하는 방식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소수자 관련 인권단체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원안을 발의한 정 의원실은 법사위가 일방적으로 원안을 수정하면서 의미를 훼손시켰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정 의원실 관계자는 “법사위 소속 의원실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게 맞느냐”고 해서 제목을 수정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으나, 정작 정의를 수정했다“고 말했다.

범죄와 피해자의 개념 축소 뿐 아니라 피해지 지원 조항에서도 이 법은 문제를 안고 있다. 원안에서는 피해자 지원에 대해 의무조항인 ‘해야 한다’로 되어있었으나 법안 심사에서 임의조항인 ‘할 수 있다’로 바뀌었으며, 여성폭력 예방교육 역시 임의조항으로 바뀌었다. 또 피해자 보호에 관한 국제개발 협력사업 근거인 20조와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설립을 법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22조는 삭제됐다.

결과적으로 2018년 12월 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 법안은 2012년 성범죄에 관한 친고죄(형법) 폐지 당시보다도 후퇴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친고죄 폐지 당시 성과 중 하나가 성범죄 대상을 부녀자에서 사람으로 개정해 성인 남성에 대한 성범죄도 처벌할 수 있게 됐지만,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은 오히려 거꾸로 간 것이다.

법 시행까지는 1년이 남았다. 일각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여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기본법이 마련됐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시행 전까지 보완하는데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차인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심의관은 “성별에 기반한 폭력이 성별에 기반한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좁혀지면서 성범죄 피해자의 5~10%에 이르는 남성 피해자를 정책 개념상 포괄하지 못하게 됐다”며 “현장과 다양한 의견 수렴을 통해 입법 취지와 현실의 간극을 최대한 좁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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