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국이 살기 힘든 나라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가지 지표가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최저 수준의 출산율이다. 직장이나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퇴사를 하거나 자퇴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 직장이나 학교에 가려고 하면 말리게 된다. 살기 어려운 사회를 떠나는 가장 극단적 형태가 자살이다. 아이를 낳았을 경우 행복보다 힘듦이 더 많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상징적 선택이 출산 기피 내지 포기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을 권하지 않듯이, 이 땅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는 혹은 힘든 사람들은 서로가 암묵적으로 아이 낳지 말라고 권하는 사회가 한국이다.

그래서 기성세대에 비해 삶이 힘든 청년세대에게 저출산 현상은 그리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니다. 아이 낳아서 헬조선 계급사회의 노예를 공급해 줄 필요가 있냐는 자조적 목소리를 젊은이들은 공공연히 한다. 반면 중장년ㆍ노년층 기성세대들 사이에서는 한결같이 “요즘 젊은이들이 아이 낳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할 수 없다” 등 걱정의 목소리가 높다. 이대로 가면 2300년경 한반도에서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거의 가짜뉴스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상식처럼 공유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이전에는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제안이 정책으로 그 기본 틀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허경영씨가 1억원의 결혼수당과 3000만원 출산수당 공약을 내놓아서 즐거운 웃음거리를 선사한 적이 있다. 그런데 허경영 식 제안을 정치판에서 심각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몇 개월 전 자유한국당이 출산장려금 2000만원 주고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모두 합쳐 1억원을 주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얼마 전 여야 합의로 출산장려금 250만원 지급을 결정했다. 2000만원의 1/10 수준이긴 하지만 기본적 아이디어는 허경영 식이다. 한국당의 허경영 식 특단의 조치로서 현금 살포 프레임에 민주당은 아동수당 조기인상이라는 정치적 성과를 노리면서 덜컥 들어가 버린 모양새다. 성평등을 토대로 한 삶의 질 향상을 국가는 장기적으로 추진하고 그렇게 해서 변한 사회가 살만하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선택해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저출산 대응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대통령을 모시고 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현금살포 출산장려 정책틀을 여야 합의로 만들었다. 다음 대선후보로 한국당과 민주당이 허경영씨 모시기 경쟁을 시작했는가?

그런데 결혼·출산 장려가 특단의 조치인가? 국가가 앞장 서 낙태시술까지 해줬던 개발독재시대 인구정책의 유산일 뿐이다. 낙태하더라도 아이를 적게 낳으면 이런저런 혜택을 주었다.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운동을 통해 결혼이주여성이 1980년대부터 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것은 특단의 조치가 아니다. 낯설지만 변화를 줄 만한 충격이 있어야 특단의 조치다. 민법에서 부계주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 특단의 조치다.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중심이 되어 가족을 이룰 수 있어야 특단의 조치다. 아빠의 성을 기본으로 해 엄마의 성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처음부터 엄마와 아빠 성 중 하나를 혹은 두 개를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혼인 중 출생자와 혼인 외 출생자 구분을 없애야 한다. 본(本)을 없애는 것이 특단의 조치다.

이런 특단의 조치를 들으면 놀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듣도 보도 못한 ‘상놈의 소리’라는 반응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 되어야 특단의 조치다. 지금까지 해오던 출산·결혼장려를 부풀리는 건 특단의 조치가 아니다. 가족관계를 평등하게 만드는 진짜 특단의 조치를 도입하면 언젠가 아이를 한번 낳아 볼까 하는 여성·남성의 수가 증가할 것이다. 그렇게 인내를 갖고 기다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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