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와 ‘자물쇠’ 없는 치매마을… ‘존엄한 노후’가 있다
‘환자’와 ‘자물쇠’ 없는 치매마을… ‘존엄한 노후’가 있다
  • 이하나 기자
  • 승인 2018.12.06 16:19
  • 수정 2018-12-06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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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치매마을 ‘호그벡’ 가보니]
169명 거주하는 ‘요양원’
직원 170명·봉사자 140명
노인들 환자복 대신 일상복
의사·간호사도 가운 안입어
취향 따라 마을 선택 가능
수퍼마켓·미용실·술집까지
치매 이전의 삶 그대로
월 이용료 500~2500유로
네덜란드 치매마을 호그벡에서 거주자들이 장을 보고 있다.
네덜란드 치매마을 호그벡에서 거주자들이 장을 보고 있다. ©호그벡

 

치매환자와 가족의 부담을 덜기 위한 ‘치매국가책임제’ 선언 이후 1년. 치매 예방과 사후관리를 위한 치매안심센터가 전국 256곳에 생겼고 치매 환자와 가족이 행복한 ‘치매안심마을’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치매는 불행의 시작’, ‘전생에 지은 업보’라며 치매를 악성질환으로 여기는 인식은 아직 그대로다. 치매를 노화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치매 환자여도 ‘존엄한 노후’를 누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으로 ‘세계 유일의 치매마을’로 불리는 네덜란드 베이스프(Weesp) 지역에 위치한 호그벡(Hogeweyk) 마을을 찾았다. 설립자인 이본느 판 아베롱헨씨와 호그벡 곳곳을 둘러 ‘환자’가 없고, ‘배회’와 ‘자물쇠’가 없다. ‘사람’이 있고 ‘산책’과 ‘품위’가 있었다. 이곳에서 ‘치매친화사회’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호그벡은 치매 환자를 위한 ‘요양원’이다. 이곳에 사는 169명은 모두 중증 치매 환자다. 이들은 환자가 아닌 ‘거주자’로 불린다. 환자복을 입은 노인이나 흰 가운을 입은 의료진도 없다. 한국의 요양원이 ‘병원’ 느낌이라면 이곳은 설명을 듣기 전에는 일반 주택가처럼 느껴질 정도다. 시설 설계 때부터 최대한 치매 이전의 일상을 누릴 수 있는데 중점을 뒀기 때문이다.

빨간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인 호그벡에 들어서자, 먼저 커다란 분수와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왼쪽으로는 마치 쇼핑몰처럼 중앙로를 사이에 두고 펍(술집)과 슈퍼마켓, 미용실, 레스토랑이 마련돼 있었다. 130석 규모의 널찍한 극장과 음악감상실, 요리실도 마련돼 있어 취향에 따라 여가도 즐길 수 있었다.

호그벡은 부지만 1만2000㎡(약 3600평) 규모로 거주시설 뿐 아니라 공원과 다양한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거주자들은 간병인 없이 홀로 장을 보고 영화를 보고 외식을 한다. 원할 때는 언제라도 산책을 하고 날이 좋으면 벤치에 앉아 일광욕을 즐긴다. 거주자들은 기억은 흐릿하지만 작은 일이라도 원하면 ‘선택’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이곳의 모든 공간은 거주자 세대가 자주 사용하거나 익숙한 기구들과 인테리어로 꾸몄다. 170여명의 직원들과 140여명의 자원봉사자는 거주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이들의 거동을 돕는다. 3년째 호그벡에서 행사기획 일을 하고 있는 자원봉사자 잉흐리드 드 흐로트(63)씨는 “이곳 노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해진다”며 “치매 때문에 우울해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시설보다 여기 노인들이 행복하다는 점은 확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호그벡 마을 거주자가 그림을 그리며 여가를 즐기고 있다.
호그벡 마을 거주자가 그림을 그리며 여가를 즐기고 있다. ©호그벡

 

치매 걸려도 불편하지 않게

호그벡 마을이 문을 연 것은 2009년이다. 요양원 간호사였던 반 아메롱헨씨는 요양시설이 과연 치매환자들을 위한 서비스인지 고민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우리 요양원에 오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을 들자, 아메롱헨씨는 “병원보다는 ‘거주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거주시설부터 치매노인들의 취향을 적극 반영했다. 거주자 세대의 생활양식을 분석해 네덜란드식, 기독교식, 문화·예술식, 인도네시아식 등 7가지 양식으로 지었다. 반 아메롱헨씨는 “인간은 다른 이와 어울려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치매환자들도 인간으로 그럴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거주자들은 다른 입주자와 어울리며 때론 산책, 목욕, 음식 만들기와 같은 일상 활동을 최대한 독립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며 “이는 치매 진행 속도를 늦추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곳에 마을에서 만난 한 여성은 금융컨설턴트로 일하던 남편이 치매를 얻자 이곳의 ‘클래식’ 주택으로 들어왔다. 그는 “8년 전 남편은 치매에 걸린 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을 나가 실종되는 일이 반복됐다”고 했다. 남편이 치매를 앓자 아내의 일상도 무너졌다. 그는 남편을 위해 3년 전 호그벡을 찾았다. 이 여성은 “브루크너와 말러, 푸치니의 음악을 좋아하던 남편의 호그벡 방에는 여전히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며 “증세가 호전되지는 않지만 빠르게 나빠지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예전의 일상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호그벡은 네덜란드의 다른 요양시설처럼 세금으로 운영된다. 거주자들은 소득에 따라 한 달에 최소 500유로(약 64만원)에서 최대 2500유로(약 320만원)를 정부에 낸다. 반 아메롱겐씨는 “기초연금이 850유로(약 100만원) 가량 되기 때문에 최소금액인 500유로를 제외해도 350유로가 생활비로 남아 비용을 내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 말했다. 호그벡의 이용료 수준은 네덜란드의 다른 요양시설과 비슷하다. 훌륭한 시설을 갖춘 이곳에 들어오려고 대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한국처럼 인기 요양원에 들어가기 위해 3~4년을 기다리는 일은 없다. 정부가 운영하는 서울요양원의 경우, 대기자가 1000명이 넘고 3년을 기다려야 입소할 수 있다. 신청 순서대로 입소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반면, 호그벡은 대기자 중 치매 증상이 심한 이들부터 받는다.

호그벡은 치매 요양시설의 모범 사례로 꼽히면서 이탈리아와 호주, 미국 등에서 벤치마킹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호그벡을 모델로 삼고 치매안심마을이 조성 중이다. 그러나 반 아메롱헨씨는 호그벡 마을을 요양시설의 보편적 모델로 보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는 “다른 나라에 반영될 순 있지만 완전한 대체 모델이 될 순 없다”면서 “중요한 것은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치매 환자도 일상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본느 판 아베롱헨씨는 “치매 환자도 일상생활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본느 판 아베롱헨씨는 “치매 환자도 일상생활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노인 10명 중 1명 치매
치매질환자 71%는 여성

중앙치매센터가 발간한 ‘대한민국 치매 현황 2017보고서’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중 치매 환자는 72만5000명이다. 전체 65세 이상 인구의 10명 중 1명에 해당한다. 치매 환자의 71%는 여성이다. 치매 전 단계인 경도인지장애환자수는 약 180만명으로, 노인인구의 25% 정도를 차지한다. 치매는 완치가 없는 병이다. 관리 등을 통해 악화를 늦추는 것 외에는 뚜렷한 방법이 없다.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치매의 특성상 평생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환자 돌봄은 대부분 가족이 떠안는데, 그 역할을 여성이 주로 전담한다. 이들을 돌보는 요양보호사도 95%(2016년 노인장기요양보험 통계)가 여성이다.

치매 환자가 늘고 그 부담이 커지면서 정부도 ‘건강하고 품위 있는 노후생활 보장’을 국정과제 중 하나로 정하고 ‘치매국가책임제’를 천명했다. 내년 예산안에는 노인 관련 지출을 올해보다 26.1% 늘린 약 13조9000억원을 편성했다. 그러면서 ‘치매천국’으로 불리는 호그벡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서울 용산구는 호그벡 마을을 본떠 전국 최초로 치매안심마을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이곳에는 전문 의료인력을 비롯해 마트, 미용실, 극장, 카페 등의 편의시설을 갖춰 치매노인들이 시설 내에서 최대한의 일상생활이 가능하도록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치매 환자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호그벡 같은 양질의 시설을 늘리는 것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투자 대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마을’로 불리지만 호그벡 역시 ‘시설’이다. 우리정부도 호그벡 같은 ‘마을’을 지역사회에 정착시키는 방식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한다는 방침이다.

유엔(UN) 등 국제사회는 ‘노인을 위한 유엔 원칙’, ‘마드리드 국제고령화행동계획’ 등을 통해 모든 사람이 안전하고 존엄하게 노후를 맞이하고, 노인의 잠재능력 개발과 지속적인 사회참여가 가능하도록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유럽 등 서구의 많은 국가는 성평등을 기초로 노인의 지속적인 참여가 가능한 사회를 만들고 고령화 문제를 적극적으로 극복하고 있다. 호그벡을 통해 존엄한 노후는 거창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늙어서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삶, 치매를 앓아도 일상을 누리며 불편하지 않는 삶, 이것이 바로 안전하고 평등하며 존엄한 노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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