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평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정기국회에서 대정부 질의를 하는 모습. 짧은 정치활동이었지만 가족법과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에 큰 기여를 했다.
1988년 박영숙 평민당 국회의원이 정기국회에서 대정부 질의를 하는 모습.
가족법과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에 큰 기여를 했다.

 

우리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천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늘 의문이 든다. 여성에게 주권은 있는 것일까? 여성들은 국가 운영에서부터 자신의 몸과 삶의 결정에 이르기까지 주권을 행사해 왔는가? 성평등 입법정책 30년사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여성주권은 여성에게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한 시간을 통과하며 여성들 스스로 만들어 오고 있다. 성평등 입법정책 30년은 여성들이 바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주권 확보 역사에 다름 아니다.

성평등 입법정책 30년의 빛나는 성과

30주년의 기점이기도 한 1988년은 성평등 입법정책사에 있어 매우 특별하다. 여성정책을 총괄·조정하는 정무장관 제2실의 업무가 시작되었으며, 고용에서 성차별 문제를 종합적으로 규율하는 남녀고용평등법이 시행된 해이자 여성의 목소리를 정치권과 정부에 전해 줄 여성신문이 탄생한 해이기 때문이다. 이후 성평등정책은 입법운동을 축으로 정책 공간을 확산해갔으며 여성들의 삶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o 차별과 폭력의 방지

채용과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남녀고용평등법의 시행을 시작으로, 1999년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고, 2005년에는 40여년간 주요 의제였던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성씨를 제외하고는 비로소 여성과 남성의 평등한 가족관계가 규정될 수 있었다. 민법 상의 평등을 확보한 가족과 관련된 차별의 개선은 조세, 연금 등의 평등을 촉진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부모가족, 이주가족 등 다양한 가족으로 그 관심이 본격적으로 확장됐다.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와 관련해서는 1993년에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생활안정지원법을 제정하여 전시 폭력으로 피해를 받은 여성들을 가시화하고 국가 지원의 근거를 마련하였으며, 1994년, 1997년 그리고 2004년 순차적으로 성폭력, 가정폭력 그리고 성매매에 관한 처벌과 피해자 보호법이 제정되었다.

o 일·가정 양립 지원과 공적 돌봄 체계의 구축

2001년 모성보호 3법으로 일컫는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고용보험법의 개정을 통하여 산전후 휴가급여를 60일에서 90일로 확대하고, 육아휴직 시 해고 금지와 동일업무나 동일한 임금 수준의 직무에 복귀하도록 규정하여 일과 가정의 양립 기반이 다져졌다.

2007년 남녀고용평등법이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로 개정되면서 노동시장에서의 돌봄 정책이 보다 강화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으며, 1991년 영유아보육법의 제정과 개정, 2005년 유아교육법의 제정, 2012년 아이돌봄지원법의 제정을 통하여 공적 돌봄 서비스가 확대되어 왔다.

o 적극적 조치와 성 주류화

여성의 참여 확대를 위한 적극적 조치는 정치 분야에서 2000년부터 정치관계법의 지속적 개정을 통해 비례대표 여성할당 50% 의무화를 이끌어냈고, 경제 분야에서는 여성기업지원에 관한 법률과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등이 제정되었으며, 의사결정과정에의 여성참여 확대는 특정 성별이 10분의 6을 넘을 수 없도록 규정한 양성평등기본법과 여성 이사 1인 이상을 할당하도록 한 농업협동조합법 등 다양한 입법으로 확산되어 왔다.

국가정책에 성평등 관점을 통합하기 위한 성주류화 조치는 성주류화 도구인 성별영향평가, 성인지 예산, 성인지 통계 및 성인지 교육을 규정하게 된 양성평등기본법, 국가재정법, 지방재정법, 성별영향평가법, 통계법 등 여러 건의 법률에서 이루어졌다.

미완의 여성 주권, 그러나 희망의 목소리

그런데 여성 주권의 관점에서 볼 때 빛나는 입법정책의 성과는 여전히 미진하고 충분하지 못하다. 성폭력 중 강간의 기본형인 비동의 간음죄 문제는 아직도 논의 중이며, 가정폭력 처벌법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피해자가 아닌 가정의 보호에 있고, 성매매 처벌의 보호법익은 여성인권이 아닌 풍속죄 수준이다. 주권 행사의 기본적 전제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 또한 보장받지 못한 채 임신중단권을 포함한 임신출산권(재생산권) 문제는 현재까지도 여성 스스로가 아닌 국가의 통제 하에 놓여 있다. 30%가 넘는 성별임금격차 문제에 대해 국가의 더 많은 관심이 요구되고 있고, 다양한 가족의 삶들이 차별받지 않고 평화롭고 따뜻하게 영위될 수 있도록 기존 가족정책의 업그레이드가 요구되고 있다. 또한 2005년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을 성급하게 폐지한 후 정책의 공백 속에서 2018년 미투 운동이 터져 나오기에 이르렀고 성차별금지법 제정을 다시 요구받고 있다. 나아가 이 모든 의제들을 정치의 장에서 보다 힘 있게 끌고 갈, 이들 의제들의 진정한 대의자가 될 여성정치인이 작금의 17%가 아닌 49%가 되기 위한 입법 정책적 결단도 필요한 시점이다.

빠른 결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은 힘겹고 어려우며, 추진하는 이들은 아주 적어 보인다. 법과 현실의 괴리는 매우 크고 법 적용의 실질적 대상은 협소하여 보편적이지 못하며, 주권 행사의 대전제인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근대적 이상은 여성의 몸에 관한한 아직도 실현되지 않고 있고, 헌법의 기본권 보장도 크게 미진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0년을 훑어보니 그리 비관적이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다. 30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새로운 30년을 이어 줄 새 목소리들이 놀랍도록 신선하고 힘차게 등장했고 이들 덕분에 여성 주권의 완성을 향해 그렇게 나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새롭게 생겼다. 새 목소리들과 그 목소리를 의미 있게 전달해 줄 언론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차인순 국회여성위원회 입법심의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차인순 국회여성위원회 입법심의관
ⓒ이정실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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