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김현숙 / 평화여성회 상임대표

필자는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민화협, 7대종단, 통일연대로 구성)의 여성위원장 자격으로 1월 21일부터 25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민족공동행사 실무회담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실무접촉결과 남북은 올해도 6·15공동선언 3돌, 8·15광복절, 개천절 등의 기념일을 계기로 서울, 평양 등 합의되는 장소에서 남북공동의 통일행사를 계속하기로 하고 오는 3·1절에는 남북이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민족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남측의 7대종단이 3월 국제 종교행사에 북측 종단을 초청했던 것이 논의 끝에 3·1절 남북공동행사로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이번 3·1민족대회는 남북의 각 종단들이 주관하고 이 행사에 북측은 상당한 규모의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여성을 비롯한 부문별(노동,농민,청년) 행사에서는 전년도의 행사 평가와 함께 2003년도 사업 전반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어떤 합의를 이루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남북은 부문별 행사도 앞으로 실무접촉을 통해 하나씩 성사시켜 나간다는 적극적 입장을 상호 확인하였다.

남북 3·1민족대회 갖기로

이번 평양방문은 북한 핵문제로 북미갈등이 고조되고 한반도 전쟁위기라는 긴박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이뤄진 방문이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남북 장관급회담이 서울에서 열리고 남북당국자간 철도·도로 회담이 평양에서 열리게 됨으로 전과는 달리 위기 속에서도 한가닥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21일 아침, 평양행 고려항공을 타려는 순간, 남북장관급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평양의 백문길 선생(북측민화협 관계자, 우리와 자주 만났던 인물)이 나타나 우리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남과 북은 위기 속에서도 이렇게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화해와 평화의 다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평양행 고려항공 출구에는 우리말고도 지속적으로 인도적 지원활동을 벌이는 우리민족서로돕기, 이웃사랑회, 전교조 관계자들이 함께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양 날씨는 추위가 많이 풀린 상태라 했다. 그러나 다음 날의 바깥 날씨는 매우 매서웠다. 평양거리는 전보다(2002년 7월 방문) 자동차의 수가 늘고 거리에는 눈에 띠게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겨울철 일이 없어서일까?). 고려호텔은 방마다 전기난로를 켜놓아 추위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회담 사이사이 방문한 평양산원, 친선병원 등은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특히 친선병원은 외국인진료 전담병원이었지만 실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웠고 각 과별 방에는 전기난로 하나가 있었지만 의사나 간호원, 환자들은 모두 혹독한 추위에 떨고 있었다.

힘겨워 보이는 겨우살이

그 유명한 평양산원도 약품부족과 장비부족이 역력했다. 정말 북쪽의 식량난, 에너지난은 심각하게 사람들의 겨우살이를 위협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리원 쪽으로도 여행을 했는데 평양을 벗어날수록 집들과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더 힘겨워 보였다.

전후, 유년기에 보았고 살았던 우리의 힘든 겨울나기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남아도는 쌀처리(지난해 말 추정 재고량은 1000여 만석)와 년 500억원 이상의 보관창고비로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북한지원을 꺼리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도 비정하고 부도덕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분단이었다.

고난에 찬 비상한 생활조건에도 불구하고 핵문제로 인한 북미 갈등에 대한 북측 인사들의 입장은 매우 단호했다. 예상을 깨고 이번 민간급 실무접촉에 북측에서는 고위급 인사(김영대, 안경호, 장재언, 전금철)들이 나와 적극적으로 핵문제에 대한 북측의 입장을 설명하고 남측의 문제인식과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적극적 노력을 보였다.

단위별 접촉에서 민화협과 여성, 청년 부문에는 전금진 부위원장(조국평화통일위원회)이, 종교 부문에는 장재언위원장(조선적십자사)이, 통일연대와 노동, 농민 부문에는 안경호 부위원장(조국평화통일위원회)이 들어와 장시간 토론하고 동석식사까지 나누는 노력을 기울였다.

어린이·임산부 지원 절실

북측 논의의 핵심은 현재 핵문제의 원인이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악의 축’ 발언이나 핵선제공격론 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현재 위기해법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북미간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것이며 핵동결 해제조치는 절대로 남측을 위협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동력을 위한 조치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남측 시민사회의 우려와 논의들을 전달하였다. 켈리 특사의 북한 핵개발계획 시인 발표후 북한의 NCND(부정도 긍정도 아닌) 정책의 문제성, 불가침조약만이 아닌 제3의 방안에 대한 고려의 필요성, 위기해결의 시간문제, 미국의 적대정책은 북한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비롯되고 이 불신은 북한의 독특한 정치체제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는 등 예민한 문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논의를 폈고 북측은 일리가 있다거나 참고할 만하다며 정중하게 경청하는 반응을 보였다.

1994년 핵위기 때 통미봉남정책으로 한국정부를 철저히 무시하던 것과 매우 판이한 반응이어서 6·15공동선언 이후 엄청나게 달라진 남북관계를 실감할 수 있었다.

북한은 매우 유연해졌고 남측 협력의 필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핵위기 속에서도 계속되는 남북의 민간 교류는 이렇게 남북사이에 다리를 놓으며 화해와 평화의 길을 닦아가고 있다. 민간이 벌이는 교류와 민족공동행사 그리고 인도적 지원활동이 지속되는 한 남북은 조금씩 편견의 벽을 허물고 민족 화해의 지평을 넓혀갈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과 임산모들에게 조건없이 먹거리와 따뜻한 사랑을 보내는 일이야말로 핵위기마저도 녹여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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