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극장] ‘국가부도의 날’, 페미니즘이라는 상상력
[기울어진 극장] ‘국가부도의 날’, 페미니즘이라는 상상력
  • 박우성 영화평론가
  • 승인 2018.11.27 20:05
  • 수정 2018-11-28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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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의 날’
‘국가부도의 날’ © CJ엔터테인먼트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과거의 재현은 단순한 과거의 소환이 아니라 현재의 공기로 과거를 재구축하는 과정이다. 복원은 복원되는 대상에 대한 현재의 해석이며 과거의 이미지는 현재의 맥락에 따라 결정되는 구성적 산물이다. 1997년 11월의 IMF 외환위기를 21년이 지난 2018년 11월의 스크린으로 복원하는 ‘국가부도의 날’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현재의 공기, 해석, 맥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이라니? 어떤 사람들은 황당해할지도 모르겠다. ‘국가부도의 날’이 여성 캐릭터 한시현에게 가장 중요한 지위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남성 캐릭터‘들’에 둘러싸여 있고, 그녀에게 페미니즘적 주체성이 인상적으로 부과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범위를 넓혀 이 영화는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르는 것의 특징, 말하자면 남성적 시각으로 구성된 이미지를 전복시켜 성차별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거나, 여성으로 영화를 보는 행위에 대해 말걸기를 시도하거나, 동시대 문화에서 난국에 처한 여성의 위치를 질문과 동시에 탈구축하는 경향들과는 확실히 온도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페미니즘 주체성 혹은 페미니즘 영화와 관련된 정밀한 접근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현실의 구체성을 방치한 엄밀화는 때로 한가해 보일 수 있다. 이 말은 세밀한 접근을 포기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리멸렬한 성차별의 역사로 가득한 한국영화계라는 구체성에 맞서 비록 그 성취가 미진할지라도 ‘국가부도의 날’이 페미니즘을 경유해 호명되어야 하고, 대중화되어야 하며, 성공을 거둬야 한다는 어떤 시급한 당위이다.

이 영화의 서사 전략은 국가부도를 대처하는 관료, 국가부도를 인생 역전의 계기로 삼는 펀드 매니저, 국가부도라는 난데없는 위기 앞에서 절체절명이 위기에 처하는 서민이라는 세 가지 시선을 교차시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의 일차적인 목적은 세 가지 상징적 시선을 매개로 그때를 모르는 현재의 관객에게 그때를 입체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닿아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공고해진 시스템이 지금의 관객이 처한 경제적 불안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국가부도의 날’
‘국가부도의 날’ © CJ엔터테인먼트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이 세 가지 시선은 균등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접속하는 과정에서 관객의 감정선을 부여잡는 시선은 국가부도를 대처하는 관료들 사이의 악전고투, 특히 기득권의 이익을 수호하려는 차관(조우진)에 맞서 서민의 안위를 생각하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의 시점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한시현의 시점을 따라 서민의 편에서, 국가를 위기에 빠트린 것도 모자라 그것으로 기득권의 자리를 공고히 하려는 정치인, 경제인, 관료의 작태에 분노하는 자리로 안내 받는다.

바로 여기가 과거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덧칠되는 현재의 공기, 해석, 맥락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그것은 IMF를 둘러싼 진실 혹은 IMF가 주는 교훈 등과는 딱히 상관없다. 과거의 복원은 복원 대상에 대한 현재의 해석이라 할 때 이 영화에서 우리가 음미해야 할 어떤 도약은, 통화정책팀장의 자리에 여성 캐릭터를 앉혔다는 사실 자체, 그러니까 위기의 중심에서 정의의 편에 여성이 서 있었다는 ‘현재’의 상상력이다. 더불어 재정부 차관으로 대표되는 남성 권력의 행간에 여성혐오의 발언을 가미함으로써, 정의와 불의의 대결구도에 성차별 구도를 덧씌우는 ‘현재’의 입장이다. 이 영화가 IMF를 설명하는 웰 메이드 재연 드라마 이상의 가치를 실현하는 유일한 지점은 IMF라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재 한국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페미니즘이라는 문제의식인 것이다.

겨우 이 정도의 장치에 페미니즘을 거론하는 것은 지나친 수사라는 지적이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영화계에 그 정도의 상상력도 극히 드물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진단이 페미니즘을 단지 흥행의 도구로 활용하는 시장의 욕망에 복무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인식도 중요하다. 그러나 역시나 우리는 페미니즘을 흥행의 도구로 활용하는 역사조차 한국영화계에 극히 희박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역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얼핏 별 것 없는 페미니즘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담론화하는 것, 시장이 페미니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증거를 지속적으로 쌓아가는 작업이 아닐까. 한시현 역을 맡은 32년 경력의 배우 김혜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문성이 주가 된 인텔리 여성 캐릭터는 처음 맡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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