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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자리에서 25년간 의상실을 지켜온 김춘심씨, 그녀의 단골손님과의 호칭은 ‘언니, 이모’가 대부분이다. <사진·민원기 기자>

보기만 해도 건강한 에너지가 느껴지고 힘이 나는 사람이 있다. 25년 한결같이 외길인생을 걸어온 김춘심(51) 씨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한가지 직업을 20년 넘게 유지하기도 쉽지 않은 법인데, 김씨는 그것도 동일한 장소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자리를 지켜왔다.

1호선 제기역 부근에 위치한 ‘현대의상실’은 예닐곱 평밖에 안 되는 작은 의상실이다. 소박하다 못해 어찌 보면 보잘 것 없어 보일 수도 있는 이 작은 양장점이 김씨의 인생 전부이고, 단골손님들이 자주 들르는 사랑방이다.

“제가 보름날 아침에 태어났다고 우리아버지께서 ‘춘심이’, 그러니까 ‘봄의 마음’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셨어요. 이름에 무슨 운명 같은 것이 따라 다니는지, 저는 진짜 한평생을 봄처녀 같은 설렘으로 매번 옷을 만들며 살았어요. 그래서 나이는 먹었어도 제 마음은 항상 젊은 청춘 같아요".

여고 졸업 후 의상실을 경영하던 언니 밑에서 월급도 안 받고 옷 만드는 전 과정을 배운 김씨는 당돌하게도(?) 스무살 때 혼자 나가 독립을 했다. 그 옛날에 혼자 압구정동에 20평짜리 가게를 얻어 오픈 준비를 하던 중 언니가 다른 사업을 하게 되면서 언니 의상실을 인수해 그때부터 디자이너의 인생을 걷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제가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었어요. 단독으로 의상실을 운영하게 되자 정말 열심히 일을 했어요. 그때 가게 인수하느라 상당한 빚을 진 상태였는데, 일 시작한 지 3개월만에 빚을 모두 다 갚았으니까요. 제가 디자인을 하고, 공장에서 재단과 재봉하는 직원들만 스무명이 넘었어요. 하루에 평균 30명씩 손님이 왔지요. 시장에서 파는 기성복과 달리 우리 옷은 하나 하나 맞춤복이라 그 손님에 맞는 정확한 디자인이 나와야 하니까 매우 섬세하고 완벽한 공정이 요구됐지요.”

단순히 옷만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김춘심씨 자체가 인정이 많고 뭐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해 그의 작은 의상실은 주부들이 속내를 털어놓는 수다방이 되었고, 고부갈등이나 남편의 바람기 같은 여성문제(?)를 상의하고 해결하는 상담실 같은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또 무슨 음식이든 같이 나눠 먹기를 좋아하는 천성을 가진 그녀인지라 점심때가 되면 단골식당에서 밥을 시켜 누구든지 후하게 식사대접을 했다. 그러다 보니 손님 중엔 근처를 지나다 밥 먹고 가려고 들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듯 수시로 들락거리다 보면 자연히 옷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따금 옷도 맞추곤 하는 것이다. 의상실에서 우연히 만난 단골손님 최소도(77) 할머니는 무려 20년째 단골이라고 했다.

“여기는 내가 옷을 안 맞춰도 매일 내 집같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에요. 이 집주인은 사람이 너무 좋아요. 세상천지 이렇게 인정이 있는 사람은 없어요. 이상한 장사꾼들이 와도 다 물건을 받아 줘요. 여긴 옷만 맞추는 집이 아니에요. 신발, 스타킹, 삼베, 가방, 치약, 칫솔... 대신 팔아달라고 온갖 물건들을 놓고 가도, 다 받아서 팔아준다니까요.”

최 할머니는 집이 구이동인데도 이곳으로 거의 매일 출근(?)하며 친자매 사이처럼 시시콜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또 다른 단골 김명묵(65) 씨는 십년 넘게 이곳 옷만 입고 있다.

“저는 이 근처에 사는데, 내 집 드나들 듯 편하게 오고 있어요. 이 집은 맞춘 옷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마음에 들 때까지 몇 번이고 고쳐 줘요. 어떤 옷이든 잘 만드는데 특히 바지 하나는 세계 최고 수준이에요. 바지는 정말 잘 만들어요. 이 집 바지를 입어 본 뒤로는 다른 바지 입지 못할 정도지요. 그리고 또 있어요. 이 양반은 상술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람들에게 너무 잘 해요. 사람들을 좋아해서 누가 오면 밥이든 뭐든 못 줘서 난리예요”

25세 때 고향선배의 중매로 만난 박홍인(54) 씨와 결혼한 김춘심 씨는 남편을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남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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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양반은 진짜 진보적이고 멋있는 남자예요. 제가 요즘 저녁 6시면 가게문을 닫고 스포츠댄스를 배우러 다니는데, 두 시간 동안 격렬하게 춤을 추고 다같이 맥주집으로 가서 한 잔하곤 하지요. 제가 3,40대 남자들하고 손 잡고 춤을 추어도 뭐라고 하지 않을뿐더러 같이 술 한잔하고 있어도 지나가다 들러 오히려 맥주 10병이나 더 사주고 가는 사람이에요. 그 남자 후배들(?)에게 ‘우리 부인이 평생 옷 만드느라 고생했는데, 우리 부인 기쁘게 해줘 고맙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그러는 거예요. 거기 있던 스포츠댄스 동료들이 저를 얼마나 부러워했는데요!”

아내의 취미생활을 기꺼이 인정해 주고 술까지 사주는 남편은 집안에서도 아내를 확실히 돕고 있다. 김씨가 의상실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남편 박씨는 아내가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아이들과 집안 살림을 전담하고 있다. 지금은 다 컸지만 성장기 시절 세 아이의 도시락과 등교를 책임진 사람도 남편이고, 지금까지 요리를 만들어 아침마다 식구들을 먹이고 있는 사람도 남편이다. 요리실력이 뛰어나 동네에서 ‘요리사’로 소문이 난 정도이고, 버섯요리와 찌개류, 낙지볶음, 삼계탕도 ‘음식점 차릴 수준’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남편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김씨가 ‘봄의 마음’으로 서서히, 부드럽고도 섬세한 여성적 감성을 남편에게 심어준 것이다.

“저는 남편의 기를 죽이는 말을 한번도 한 적이 없어요. 솔직히 집안에서 돈은 제가 많이 벌었지만, 돈 가지고 남편에게 싫은 소리 해본 적 없습니다. 그 반대로 항상 남편에게 사랑 받으려고 노력했어요. 남편 사랑을 얻기 위해 다른 누구보다 먼저 남편의 부모와 형제들에게 잘 해 줬지요. 그랬더니 자연히 남편이 저를 인정하고, 제가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대신 맡아 주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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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그녀는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인 시동생에게서 “형수, 천만원 범위 내에서 내가 형수한테 뭐든 선물할 테니 갖고 싶은 물건 있으면 얘기하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시동생 말이, “내가 대학 다닐 때 형수가 2백만원씩 두 번이나 등록금 대준 것을 이제는 갚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런 시동생이 어디 있겠어요? 그 말 듣고 너무 기뻤어요. 그래서 난, 그런 거 다 잊어 버렸다, 오히려 그런 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어 줘서 고맙다, 그랬지요. 사람이 진심으로 베풀면 언젠가 그 모든 공덕들이 다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아요. 돈, 돈, 돈 한다고 돈이 나한테 오는 것도 아니고, 진짜 일이 좋아서, 일이 재미있어서 꾸준히 하다 보면 돈은 어느새 저절로 따라 온다고 봐요.”

늘 설레는 봄처녀 심정으로 옷 하나 하나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그녀는 ‘임자 없는 옷은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한다. 똑같은 옷을 수십 벌 만들어 시장에 내보내 아무나 마구 사입는 옷은 결코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녀의 자존심이다. 그 사람을 알고, 그 사람한테 어울리는 디자인과 색깔과 옷감을 골라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작품을 만들어 왔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어느 땐 좋은 옷감이 들어오면 어느 손님의 얼굴이 자동으로 떠올라 예약하지도 않았는데, 한밤중에 그 손님을 생각하며 혼자 옷을 완성해 놓기도 한다. 그러면 다음에 찾아온 그 손님에게 입혀 주면, “어떻게 나한테 어울리는 옷을 미리 맞춰 놓았느냐”며 감동해 사간 적도 많다고 한다. 물론 간혹 가다 입어 보기만 하고 그냥 가는 손님들도 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세 명을 위한 옷’이다. 성격이나 취향, 체격이 비슷한 세 사람을 동시에 생각하고 옷 하나를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러면 셋 중 한 명은 반드시 옷을 구입했다. 그런 지혜로 아이엠에프를 무사히 넘겼다고 한다.

큰 딸 현정(25)이가 틈틈이 엄마 일을 돕고 있고, 둘째 딸 민정(23)이는 한양대 식품공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막내아들 세준(20)이는 현재 군대에 가 있다.

여자 거인으로 유명한 농구선수 김영희 씨가 그녀의 오랜 단골이다. 김씨의 키가 2미터도 넘는 까닭에 김춘심 씨는 의자에 올라가서 치수를 잰다. 김영희 씨는 일상복은 물론 투피스, 원피스 정장까지 모두 이곳에서 옷을 만들어 입는다. 개그맨 김형곤씨의 이모도 자주 왔었고, 주로 4,50대 여성들이 단골들이다.

“주부들이 가정에서 희생할 필요가 없어요. 우선 내 몸이 편해야 식구들도 돌볼 수 있는 거잖아요? 저는 한길로만 가면서 일에서 즐거움을 찾았고, 남편이 가사일 하도록 다 유도했어요. 제가 일부러 밥도 안 하고 남편이 하게끔 만들었어요. 그래서 우리 딸이, ‘우리 엄마는 맛있는 게 있으면 제일 먼저 자기가 먹고, 그 다음에 남편 주고, 그러고도 남는 게 있으면 자식 준다’ 그래요. 주부들이 혼자 일을 다 하려면 몸이 망가져요. 남편과 자식들에게 분담을 시켜야 돼요.”

손님들이 건강해야 돈을 잘 벌어 옷을 맞춰 입을 수 있기 때문에 김씨는 침구사인 남편에게 침 놓는 것을 배워 아픈 손님이 오면 일일이 건강까지 돌봐 주고 있다.

“나이 예순이 되면 라틴댄스 무도장을 차릴 거예요. 뒤늦게 시작했는데 춤을 통해 새롭게 인생을 배우는 것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운동을 매일 하니까 살도 7킬로나 빠지고 뼈가 튼튼해져 아무리 걸어도 무릎이 아프지 않아요. 우울하고 사는 게 시시한 주부들에게 꼭 스포츠댄스를 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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