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땀 냄새와 테스토스테론
충만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일상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배신과 거짓말과 욕망의 데이터

 

『이제 나를 알게 될 거야』(고정아 옮김, 엘릭시르 펴냄)
『이제 나를 알게 될 거야』 (고정아 옮김, 엘릭시르 펴냄)

2016년 미국 매체 <애틀랜틱>에는 ‘지금 최고의 범죄 소설은 여성들이 쓰고 있다’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2013년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가 전대미문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폴라 호킨스의 『걸 온 더 트레인』, 리안 모리아티의 『허즈번드 시크릿』 등이 줄줄이 등장했다. 원래부터 미스터리 소설의 주독자층이었던 여성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남성들의 모험담을 읽는 구경꾼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목소리와 (남성들은) 상상하기 힘든 감정적 압박에 시달리는 심장을 가진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가정이라는 친밀한 사적 공간에서 여성이 겪는 혹은 여성이 가하는 폭력의 양상은, 기존의 남성 중심 범죄 소설에서 중심을 이뤘던 피와 땀 냄새와 거친 욕설과 테스토스테론 충만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가정 스릴러(domestic thriller)’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여성의 일상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배신과 거짓말과 욕망의 데이터는 최근의 범죄 소설 그래프에서 열광적으로 높은 키를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통칭 ‘틴 에이지 누아르’라고 불리는 종류의 범죄 소설 서브 장르는 또 범위를 좁혀 나간다. 부모와의 불화, 혹은 절대로 자신의 변화를 눈치채선 안 되는 부모에게 태연하게 늘어놓는 거짓말, 몇 번의 눈짓과 손짓만으로 나의 학교생활을 지옥으로 바꿔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또래 소년소녀들. 십 대 소녀들이 가정과 학교와 친구들 사이에서 겪는 그 같은 ‘감정적 전쟁’이 바로 이 장르의 핵심이다. 평범한 교외 지역 중고등학생 소녀의 삶이야말로 알고보니 무시무시한 전장이며, 문자 그대로 여기서 살아남느냐 아니냐 이기느냐 패배하느냐의 내기를 통해 소녀들은 앞으로의 삶을 가늠하게 된다.

최근 출간된 메건 애벗의 범죄 소설

 

는 바로 그 틴에이지 누아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2016년 7월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 작품의 주인공 데본 녹스와 당시 리우 하계 올림픽의 최고 스타였던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를 비교하는 목소리들도 있었다. 시몬 바일스는 도마와 이단평행봉, 평균대, 마루 등 기계 체조의 전종목을 휩쓸며 개인종합 금메달을 가져간 145㎝ 키의 경이로운 체조 선수였다. 올림픽의 영웅으로 등극한 그녀를 찬양하는 건 쉬웠다. 그러나 그 직전까지 시몬 바일스가, 그리고 다른 모든 운동선수들이 전세계를 통틀어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위해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어떻게 극한까지 밀어붙이는지, 그 하나의 꿈, 그 하나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들이 무엇을 희생하는지에 대해 당사자가 아닌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예외적이고 경이로운 단 한 명, 평범한 주변 사람들 모두를 압도하는 힘과 에너지와 열망의 크기. 『이제 나를 알게 될 거야』는 바로 그런 힘을 가진 어린 체조 선수와 그녀의 주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병치시킨다.

젊은 시절 미친 듯한 사랑에 빠진 케이티와 에릭은 임신 때문에 예상보다 이른 결혼을 했고, 그때 태어난 아이가 데번이다. 이제 열여섯 생일을 앞둔 체조 선수 데번은 ‘한 세대에 한번 태어날까말까 한 천재’로 불린다. 녹스 가족의, 이 마을 커뮤니티의, 체육관의 희망. 당연히 국가대표로 뽑혀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딸 것으로 모두가 의심치 않는 존재, 매분 매초 모두의 기대와 선망과 질투를 받게 되는 특별한 아이. 그리고 이 체육관의 텀블링 코치 헤일리의 남자친구이자 어린 체조 선수들의 흠모를 한몸에 받던 아름다운 청년 라이언이 뺑소니 차사고로 사망한다. 이 사건으로 헤일리가 무너지고, 체육관의 기둥이자 유명한 코치이며 헤일리의 삼촌이기도 한 테디가 비틀거리고, 큰 대회가 코앞에 다가왔지만 체육관 전체가 와해되기 일보 직전이다. 온갖 억측과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고, 케이티는 ‘냉혈 마녀’라든가 ‘얼음 눈’으로 불리던 자신의 수수께끼 같은 딸 데번에게도 어떤 변화와 흔들림을 감지한다. “저라는 아이에 대해서 엄마는 모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소설 앞부분에서 스쳐가듯 등장하던 몇몇 단어와 몇몇 인물이 후반부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띄고 리플레이된다. 모든 사람이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은 범죄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이겠으나, 『이제 나를 알게 될 거야』의 그 세계는 특별히 섬세하고 미묘하게 조직화된다. 어떤 살인 사건을 둘러싼 동심원이 점점 확장되고, 그 한가운데 존재하는 비범한 소녀가 누구도 모르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범죄가 소녀를 닮아가는지 소녀가 범죄를 닮아가는지 모호한 상황에서, 아주 미세한 루틴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운동선수의 신체와 영혼이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범죄 앞에서 어떤 식으로 ‘적응’하는가를 평행우주로 그린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섬세함은 한층 돋보인다. “이제 나를 지배하는 것은 욕망뿐이다. 이기려는 욕망, 그리고 최고가 되려는 욕망, 비범해지려는 욕망이다.” 소녀가 주인공인 범죄 소설이 그 어떤 거친 남성들의 몸싸움만큼이나 더욱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것, 메건 애벗의 말마따나 “누아르의 주요 사건은 열세 살 소녀의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과 아주 잘 어울린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