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힘 프라이어 연출의 바그너 오페라 ‘라인의 황금’

아힘 프라이어 연출의 바그너 오페라 ‘라인의 황금’ 공연 중 한 장면. 사진=강일중 제공
아힘 프라이어 연출의 바그너 오페라 ‘라인의 황금’ 공연 중 한 장면. 사진=강일중 제공

“나는 사랑을 저주한다.” 지하세계의 알베리히는 이 선언과 함께 라인강 처녀들이 지키고 있던 강 깊은 곳의 황금을 탈취한다. 사랑을 포기한 대신, 금을 택한 것이다. 이때부터 재앙이 시작된다. 라인의 황금을 녹여 만든 반지를 가진 자는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첫 소유주인 알베리히는 물론 이후 반지를 차지한 자들에게는 예외 없이 저주가 내린다.

독일의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가 남긴 불후의 명작 ‘니벨룽의 반지’ 이야기다. 북구의 영웅설화에 기반을 둔 이 작품은 절대 권력을 향한 인간의 덧없는 욕망, 사랑, 배신, 그리고 삶의 허망함 등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11월 14일부터 18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려진 ‘라인의 황금’은 그 4부작 오페라의 첫 번째 작품이다.

한국에서 바그너 작품을 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지금까지 국내 무대에서 바그너 작품이 공연된 사례는 ‘탄호이저’, ‘파르지팔’, ‘로엔그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등 양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베르디나 푸치니 작품과는 달리 대중성이 그리 없는 데다 바그너의 오페라를 제대로 소화해낼 수 있는 성악가와 연주진 확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네 편의 공연시간이 15~16시간에 이르는 대작 ‘니벨룽의 반지’를 모두 올리는 작업은 국내 오페라계의 현실을 고려하면 매우 어렵다. 70년의 오페라 역사를 가진 한국에서 ‘니벨룽의 반지’는 그간 딱 한 번 공연이 이뤄졌다. 외국작품 초청공연으로, 2005년 세종문화회관에서 발레리 게르기예프 지휘로 이뤄진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 버전이었다. 이번 '라인의 황금'은 신생 월드아트오페라(단장 에스더 리)가 ‘니벨룽의 반지’ 전체를 2020년까지 한국에서 처음으로 제작해 선보인다는 야심찬 계획에 따라 내놓은 첫 번째 작품이다.

아힘 프라이어 연출의 바그너 오페라 ‘라인의 황금’ 공연 중 한 장면. 사진=강일중 제공
아힘 프라이어 연출의 바그너 오페라 ‘라인의 황금’ 공연 중 한 장면. 사진=강일중 제공

연출가는 아힘 프라이어(Achim Freyer). 독일 출신의 오페라 연출가 겸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명성을 쌓은 그는 이미 2005년 이래 로스앤젤레스 오페라가 제작한 ‘니벨룽의 반지’를 연출한 경험이 있다. 한국에서는 2011년 가을 국립창극단의 초청으로 ‘수궁가’를 독특한 방식으로 연출해 화제가 됐었다. 프라이어는 연출뿐 아니라 평소 무대·의상·조명·영상 스태프의 역할을 다 맡는다. 그가 로스앤젤레스 오페라를 위해 무대화한 ‘니벨룽의 반지’와 ‘수궁가’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표현주의적 설치미술 작품처럼 무대를 꾸몄고, 출연진에게 마스크를 씌웠다는 점이다. 오페라나 창극처럼 목소리가 아주 중요한 요소인 장르에서 가면을 쓰게 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다.

그 특징은 이번 ‘라인의 황금’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앙상하고 차가운 느낌의 거대한 철제구조물이 설치된 무대는 공상과학영화의 배경 같은 이미지다. 난쟁이 족속 니벨룽의 지도자로 사랑을 저주한 알베리히는 흉측한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신들의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보탄은 겸은 칠 얼굴에 또 하나의 마네킹 안면부 같은 탈을 썼다. 보탄의 아내 프리카나 불의 신 로게 등은 모두 흰 분칠의 특수분장을 했다. 보탄 신의 주도로 완공된 발할 성은 무대 천장 위쪽으로 흡사 작은 장난감처럼 조명을 받은 채 매달려 있으며 극 중간에 느닷없이 로켓 모형이 무대 바닥에서 천장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아힘 프라이어 연출의 바그너 오페라 ‘라인의 황금’ 공연 중 한 장면. 사진=강일중 제공
아힘 프라이어 연출의 바그너 오페라 ‘라인의 황금’ 공연 중 한 장면. 사진=강일중 제공

작품 안에 사랑 대신 재물과 권력을 탐낸 것에 대한 응징처럼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을 비하하고 희생시킨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드러내는 대목들이 있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보탄 신은 견고한 성을 짓기 위한 거인과의 계약 때 성채 완공의 대가로 여신인 프라이어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평소 영원한 젊음을 유지토록 해 주는 사과를 정원에서 재배해왔던 프라이어가 사라지면서 남신(男神)들은 기력이 쇠해 버린 것. 보탄의 아내 프리카도 “당신과 같은 추잡한 남자들이 권력을 추구하는 동안에는 소중하게 아껴야 할 것이 하나도 안 보이나 보죠?”라며 남신들을 책망한다.

아힘 프라이어 연출의 ‘라인의 황금’은 무대와 의상 등에서 충분히 독특함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바그너 팬들에게는 역시 충분히 실망감을 안겨줄 수 있는 작품이다. 무대 위의 장면 전개와 연주되는 곡의 엇박자도 한몫을 한다. 바그너 작품에서 유도동기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무대에 거인들이 이미 등장한 상태인데 뒤늦게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거인의 유도동기 부분이 연주되면서 극적 긴장감은 크게 약해졌다.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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