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예술가의 삶과 예술] “한 달 동안 번 30만원을 몽땅 작업실 월세로 냈죠”
[여성예술가의 삶과 예술] “한 달 동안 번 30만원을 몽땅 작업실 월세로 냈죠”
  • 정필주 독립 큐레이터(예술사회학)
  • 승인 2018.11.12 20:05
  • 수정 2018-11-14 17: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예술가의 삶과 예술 ⑤ 정정엽 작가
‘자기만의 방’의 한국여성작가 버전
“멈추지 않고 작가로서의
삶을 창작하기” 33년
정정엽,  Village_Dureup,  162x130cm, 캔버스에 오일, 2013
정정엽, Village_Dureup, 162x130cm, 캔버스에 오일, 2013

여성이 소설 등 문학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꼭 있어야 한다고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미술의 경우, 작업실은 창작 활동에 있어 대부분의 작가에게 필수적인 자기만의 방이다. 작가에게 작업실은 예술세계 구축의 장일뿐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증명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작업실을 개척하고 지속해나가기 위해 많은 여성작가들은 고군분투한다.

여성으로는 최초로 올해 ‘고암미술상’을 수상한 정정엽(56) 작가는 그런 점에서 후배 여성작가들에게 크고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팥, 곡식, 나물과 상처난 과일 등을 그리면서 생명과 여성을 이야기하는 정 작가는 여성으로서 작업을 한다는 것 혹은 여성작가가 자기 공간을 갖고 창작 행위를 한다는 것의 의미를 본인이 거쳐 왔던 작업실 이야기로 풀어내는 작업을 완성했다. 그 결과물은 동일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나의 작업실 변천사(1985-2017)’, 헥사곤, 2018)

1985년, 졸업 직후 혜화동에 작업실을 얻었지만, 밤낮으로 일해 손에 쥔 돈 30만원 모두를 집주인에게 주고서야 작업실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91년에는 가정집 방 두 칸 중 한 칸을 작업실로 썼다. 어린 아들을 거실에 앉혀놓고 뒤돌아 작업하다 한참 후 돌아보니, 아이가 입 속에 우물우물하며 지우개를 먹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아이를 기르며 어린이집과 작업실을 바쁘게 오가는 이야기, 더 이상 작업을 쌓아둘 곳이 없어 새로운 작업실을 얻으려 전전긍긍한 좌충우돌기, 집주인이 월세를 올려 짐을 싸야했던 이야기 등은 모두 ’실화‘이며, 자그만치 33년 분량으로 담겨있다.

여전히 ’천재예술가‘ 모델이 완고한 가운데, 미술 분야는 슈퍼스타가 된 뒤에야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작가‘ 혹은 ’여성으로서의 작가‘라는 신비화되지 않은 ’살아있는 롤모델‘을 찾기는 어려운 것이다. 일찍이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은 ’왜 위대한 여성미술가는 없는가‘라고 물으며 ’위대성‘을 질문했듯이, 그 ’위대성‘에 대한 정의는 많은 여성작가들의 삶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공유되면서 새롭게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정정엽, Picked Fruits from Hagil-ri,  162x130cm, 캔버스에 아크릴릭, 오일,  2014
정정엽, Picked Fruits from Hagil-ri, 162x130cm, 캔버스에 아크릴릭, 오일, 2014

정정엽 작가는 15회의 이사를 거듭한 끝에 현재의 미리내 작업실에 8년째 정착 중이다. 그는 작업실을 유지해왔던 지난 33년을 돌이켜보며 이를, “멈추지 않고 작가로서의 삶을 창작하기”로 요약해서 말했다. 여기에는 작가는 작품을 창작할 뿐 아니라, 작가로서의 삶도 창작해내는 사람이라는 그의 오랜 지론이 담겨있다. “여성의 삶은 전범이 없기 때문에, 여성의 모든 활동은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 이 순간도 고군분투하는 이 땅의 많은 여성작가들에게 힘이 되는 메시지이자, 여성작가들의 멈춤 없는 창작활동, 자기만의 방 지속하기를 응원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정엽 작가는 내년 6월 고암미술상 수상 기념 전시(충남 홍성군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를 앞두고 작업에 몰두중이다.

정정엽 작가
정정엽 작가

정정엽 작가

1985년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나의 작업실 변천사‘(이상원 미술관, 2018), ’벌레‘(갤러리 스케이프, 2016), ’off bean’(갤러리 스케이프, 2011), ‘얼굴 풍경’(대안공간 아트포럼 리, 2009), ‘지워지다’(아르코미술관, 2006),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이십일세기화랑, 1995) 등 12회의 개인전을 치렀다. 2012년 제 1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포스터 작업도 그의 작품이다. 참여한 주요 단체전으로는 ‘부드러운 권력’(청주시립미술관, 2018),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 “어머니”’(제주 도립미술관, 2016), ‘어머니의 눈으로’(KCCOC, 시카고, 2014), ‘아시아 여성 미술제’(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2012) ‘부산비엔날레’(2004)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2000) 등이 있다. 주요 작품 소장처로는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아르코 미술관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50 (3가 222번지) 골든브릿지빌딩 1층, 9층
  • 대표전화 : 02-318-93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준철
  • 제호 : (주)여성신문사
  • 사업자등록번호 : 214-81-03304
  • 대표이사 : 김효선
  • 발행·편집인 : 김효선
  • 여성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8 여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admin@wome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