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속으로]

노라, 그는 유죄인가? - 유리 부투소프 연출의 연극 '인형의 집'

"네, 맞아요. 전 남편을 속였어요."

노라의 어조는 아주 단호하다. 흡사 재판정에서 재판장 또는 배심원들을 향해 당당하게 자신이 무죄임을 밝히는 피고인 같은 모습이다. 그는 텅 빈 무대의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정면의 객석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간다.

예술의전당 제작 연극 '인형의 집'  공연의 한 장면. 사진_강일중
예술의전당 제작 연극 '인형의 집' 공연의 한 장면. 사진_강일중

"하지만 그건 남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어요."

예술의전당 제작으로 CJ토월극장 무대 위에 오른 헨릭 입센 원작의 '인형의 집'은 노라의 이 대사로 시작됐다.

이어 노라 내면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 같은 출연진 5명의 광기 어린 군무가 어두운 조명 아래 펼쳐진 다음 남편 토르발이 혼자서 객석을 향한 채 "안녕하세요."를 뜻하는 여러 나라 말로 인사를 한 후 제 말을 한다. "요리, 쇼핑, 그리고 그저 돈. 천박해!" 자신이 그렇게 사랑한다는 아내 노라의 외모와 성격을 얘기하면서 그는 은연 중 경멸감을 드러낸다.

예술의전당 제작 연극 '인형의 집'  공연의 한 장면. 사진_강일중
예술의전당 제작 연극 '인형의 집' 공연의 한 장면. 사진_강일중

러시아 연출가 유리 부투소프가 무대화한 신작 '인형의 집'은 이 두 주요 등장인물의 독백 같은 대사 장면을 작품의 처음에 배치하면서 1879년 발표된 입센의 희곡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냈다.

주인공 노라는 건강이 나빠진 남편 토르발을 요양시키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고지식한 남편 몰래 급전을 얻게 된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가정적이고 순종적이었던 노라는 요양 후 건강을 되찾고 은행장이 된 남편에 의해 천박한 여자로 취급받게 된다. 자신이 가정에서 '놀이 인형'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노라는 결국 세 자식과 남편을 박차고 떠난다.

원작이 사실주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무대는 전혀 사실적이지 않다. 고정장치는 없이 필요에 따라 얼음이 그득 담긴 대야, 보름달 같은 모양의 원형 패널 등 다양한 소품과 도구가 무대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며 장면이 진행된다.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 극 초반에 노라와 토르발이 객석을 정면으로 보고 자신의 입장을 직접 얘기하는가 하면 랑크 박사 역의 배우는 극중 상황을 관객에게 설명하거나 내레이션을 하기도 한다. 몰입과 동화가 아니라 관객이 현실을 직시하고 깨어있도록 하는 형식이다. 결국, 극장 안의 관객도 부지불식간에 연극에 편입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술의전당 제작 연극 '인형의 집'  공연의 한 장면. 사진_강일중
예술의전당 제작 연극 '인형의 집' 공연의 한 장면. 사진_강일중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이라고도 평가받는 작품이니만큼 주된 이야기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배우가 '''그녀'의 차이가 과연 무엇인지를 묻는 장면도 있다. 그 질문은 작품에서 갑자기 노라 역을 토르발이, 토르발 역을 노라가 연기하는 등 역할의 뒤바꿈을 시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또 중간에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아내에 대해 고압적인 남편의 이미지를 드러내려는 듯 토르발이 느닷없이 조선 시대의 갓 쓰고 도포 입은 모습으로 등장하게 했다.

대사 대신 춤 장면이 많은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내면 심리나 서로 간의 갈등이 무용으로 묘사된다. 첫 장면의 5인 군무를 비롯해 종종 춤의 에너지가 무대를 그득 채웠다. 배우생활을 하며 발레를 익혀왔던 우정원 배우가 린데 부인 역으로, 현대무용 무용수로도 활약하고 있는 김도완 배우가 캐스팅된 것도 그런 연출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읽힌다.

예술의전당 제작 연극 '인형의 집'  공연의 한 장면. 사진_강일중
예술의전당 제작 연극 '인형의 집' 공연의 한 장면. 사진_강일중

등장인물들의 암울함과 질식할 것 같은 심리상태를 무대 천장의 조명 그리드를 무대 바닥 가까이 내리거나 벽면에 어두운 실루엣으로 처리함으로써 극적 긴장감을 높였다.

여성해방과 성평등을 환기해온 문제작으로 평가받는 '인형의 집' 마지막 장면에서 노라는 "이제 난 나 자신과 내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이해하기 위해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라며 집을 나간다. 노라 역의 정운선, 토르발 역의 이기돈 등 5명의 출연진이 모두 안정적인 연기를 펼치는 것을 보는 맛이 있다.

무대화 작업을 지휘한 유리 부투소프는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에서 최고의 연출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한국 연극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러시아 최고의 연극상인 황금마스크상을 비롯한 주요 연극상을 많이 받은 그는 2003년 연극 '보이체크', 2008년 연극 '갈매기' 공연을 통해 한국 관객과 만났었다.

공연은 CJ토월극장에서 1125일까지다.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강일중. 공연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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