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매 맞아 죽은 여자들을 위한 위령제
[기고] 매 맞아 죽은 여자들을 위한 위령제
  • 여성주의 칼럼니스트 끝순
  • 승인 2018.11.07 11:30
  • 수정 2018-11-07 19: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기자회견이 열려 참가자들이 국가 가정폭력 대응시스템 전면 쇄신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10월 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기자회견이 열려 참가자들이 국가 가정폭력 대응시스템 전면 쇄신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기자

 

“니 어매 어딨냐?” 아버지가 방문을 벌컥 열고 엄마를 찾았다. 나는 언니와 함께 당시 텔레비전 인기 프로그램이던 ‘테마게임’을 보고 있었다. 이OO 배우가 주인공이었고 해골이 된 어머니의 입에 밥을 떠먹여 주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1990년대 말의 어느 토요일 밤, 계절은 겨울이었다. 그날 엄마는 걷지 못할 정도로 아버지에게 구타당했다. 팔로 기어서라도 도망치려 안간힘 쓰는 엄마의 옆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큰 소리로 우는 것뿐이었다. 끝까지 보지 못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노력해 곱씹으며 무작정 무엇이라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래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니 어매 어딨냐?”는 환청에 시달린다.

‘매 맞아 죽은 여자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렸다. 1997년 5월 21일 정오, 한국여성의전화와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추진 범국민운동본부’가 아내폭력으로 사망한 여성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개최했다. 30년간 시부모, 시조부모를 희생적으로 수발해 국무총리 효부상을 받았으나 남편에게 맞아 죽은 이OO 씨 애도를 시작으로 머리에 삼베 수건을 쓴 참석자들은 사망한 여성들의 이름을 외고 ‘매 맞는 어머니의 기도’를 낭송했다. 그날로부터 21년이 흘렀다. 1998년 7월 1일부터는 가정폭력방지법도 시행되었다. 한데 우리는 여전히, 거의 매일 매 맞아 죽은 여자들의 넋을 기려야 한다.

2018년 10월 30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국정감사에 ‘강서구 가정폭력 가해자에 의한 여성살해사건’ 피해자 자녀가 참고인으로 출석했다. 어머니가 주차장에서 살해당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고, 보복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매일 아침 현관문 열기가 두렵다’라던 그녀가 어렵게 집 밖으로 나와 각 상임위 위원, 보좌진, 부처 공무원, 취재진 수백 명이 북적이는 국정감사장에 와서 꺼낸 말은 ‘고작’ “가정폭력은 더 이상 가정의 문제가 아닙니다”였다. 20년 전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촉구 운동 때 외쳐진 그 말, 경찰청 가정폭력 방지 캠페인에 쓰이는 그 말, 교과서에도 대선 후보 공약집에도 있는 그 흔한 말, 그것이 인용된 모든 페이지를 바닥에 깔면 한반도를 다 덮을 수도 있을 그 발에 차이게 흔해빠진 말 말이다. 한데, 한국사회에서 가정폭력이 정말 폭력으로 통용되고 있나? 그렇다면 어떻게 강서구 여성살해사건 가해자는 폭행 신고로 경찰에 연행되고 2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와 집기를 부수며 아내를 눈앞에 데려오라고 윽박지를 수 있었을까. 어째서 법원이 남편에게 접근금지명령을 내렸음에도, 피해자 본인이 그의 접근을 피해 4년 동안 6번이나 거처를 옮기고도 끝내 살해당해야 했을까. 어째서 피해자 자녀들은 사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온라인에 직접 아버지의 심신미약 주장을 반박하며 사형을 구형해 달라고 호소해야 했을까. 이유는 간명하다. 국가가 가정폭력을 폭력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위해 분투한 한 여성운동가의 사연을 소개한다. 1997년 그 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이제 아버지가 때리면 경찰을 부를 수 있어”라고 했다는. 자기 손으로 만든 법으로 어머니를 감쌀 수 있다는 감격과 희망에 부풀었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그러나 법이 있어도 가정폭력 피해자는 구조될 수 없다는 절망을 확인시켜준 세월을 되새기면 나는 언제나 울고야 만다. 상상해 본다.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벌벌 떨던 그 밤, 열 몇 살의 나에게 서른 몇 살의 내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경찰에 신고하지 마. 아버지가 돌아오면 엄마를 더 때릴 거야. 아무도 너를 도와주지 못해. 그러니 울지 마.’ 이 말 밖에는….

나는 생존하고 싶다. 가정폭력이 폭력이 아닌 이 사회에서, 매일 매 맞아 죽은 여자들의 위령비를 세워야 하는 이 묘지 같은 곳에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는 각성해야 한다. 가정폭력은 ‘여성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이다. 여성단체, 여성가족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여성 국회의원, 청와대 여성 어쩌고 TF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다. 생각해야 한다. 그대들이 보호하겠다는 ‘가족의 가치’가 정말로 가족을 보호하고 있는가를. 쉽게 풀려난 가정폭력 가해자가 집으로 돌아가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를. 얼마나 많은 시체를 넘어 그 수많은 법안과 판결문들이 그대들의 책상에 올랐는가를.

매 맞아 죽은 여자들을 위한 위령제는 멈춰야 한다. 가정폭력은 가정의 문제가 아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50 (3가 222번지) 골든브릿지빌딩 1층, 9층
  • 대표전화 : 02-318-93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준철
  • 제호 : (주)여성신문사
  • 사업자등록번호 : 214-81-03304
  • 대표이사 : 김효선
  • 발행·편집인 : 김효선
  • 여성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8 여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admin@wome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