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쓰백’, 새로운 가족을 그리다

영화 ‘미쓰백’ 스틸컷
영화 ‘미쓰백’ 스틸컷

 

어린 시절 학대당한 트라우마를 지닌 전과자이면서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백상아. 그녀는 어느 날 과거의 자신처럼 부모에게 학대당하는 어린 소녀 지은을 만난다. 영화 ‘미쓰백’은 외면적으로는 아동폭력, 가정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가족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도대체 모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지점은 아이에게 공감하는 방법으로 모성애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아가 지은을 외면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성애가 아니라 가정폭력을 경험한 피해자이자 살아남은 생존자에게 지속되는 고통과 상처 때문이다. 폭력이라는 외상을 지닌 한 성인 여자와 그녀처럼 학대받는 아이는 서로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하고 이해함으로써 서로에게 의지한다.

‘미쓰백’에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엄마가 나오지 않는다. 알코올중독자 엄마, 아이를 때리고 학대하는 엄마, 자식을 버리는 엄마만 있다. ‘여성이라면 엄마라면 누구나 아이를 사랑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술에 절어 있는 상아의 엄마나 지은 아빠의 동거녀인 미경을 보면 산산이 부서진다. 여기서 ‘계모는 사악하다’라는 상투적인 이미지를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다. 제 배로 낳지 않으면 모성이 아니라는 말은 제 핏줄에 대한 집착을 반증하는 고정관념일 뿐이다.

극중에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매순간 날 배신하는 게 인생’이라는 상아의 말은 내게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매순간 배신하는 것이 ‘엄마-되기’라는 말로 들렸다. 상아의 엄마나 지은의 계모나 상아나 모두가 ‘모성’이라는 ‘엄마-되기’에서 좌절하고 분노하며 분열한다. 극중에서 상아는 ‘이런 내가 엄마가 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학대로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지 못한 채 일그러진 삶을 살아왔으며 마사지와 세차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저임금 노동자 가난한 독신녀인 그녀가 말이다.

그러나 낳았다고 다 엄마가 되는 것도 낳지 않았다고 엄마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모성’은 허구이자 신화다. 현실적으로 이상적인 아버지가 존재할 수 없듯이 이상적인 어머니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완벽한 엄마는 없다. 성차별이다. 그런데도 이 사회는 여성에게 그냥 엄마도 아니고 ‘완벽한 엄마’가 돼야한다고 끊임없이 강요한다. 이 세상에는 무수히 다른 제각각인 엄마들이 있다. 그녀들 모두를 ‘엄마’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 비난할 수는 없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말처럼 엄마 역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녀들이 ‘엄마’라 불리기 전에 먼저 한 인간이자 이름을 지닌 개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엄마-되기’를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다. 나는 내 정체성이 모성과 엮어서 나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아무개의 엄마’로만 간주되는 삶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만약 모성이 내 이웃과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고 경이로운 대자연에 감동해 모든 존재 앞에 겸허해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세상의 헐벗고 가난하며 차별받고 고통 받는 모든 약자에게 공감하고 그들 편에 서는 것을 모성이라 한다면, 나는 모성적인 인간일 것이다. 그러나 모성이 타자에게 모든 걸 거는 도박이거나 타자를 해하는 이기성을 의미한다면 나는 모성애가 없다.

지은이가 상아에게 뭐라 불러야하냐고 물을 때 상아는 자신을 ‘미쓰백’으로 부르라고 한다. 엄마도 이모도 언니도 아닌 그저 ‘미쓰백’. 지은을 지켜주는 보호자를 자처하는 상아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인 ‘미쓰백’이라 불리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성이 한 인간으로 자립하기 위해서나 온전한 인간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정을 꾸려야만 한다는 주장이나 여성의 모성이 오직 결혼 유무와 자식 유무로 결정된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역시 성차별이다. 그런데도 여성의 정체성을 집요하게 모성에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차별로 유지되는 가부장 사회에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낳아주었다고 해서 다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같이 있어주는 것 곁을 지켜주는 존재가 부모다. 극중 상아의 대사처럼 ‘나는 너한테 가르쳐줄 것도 없고 줄 것도 없어. 대신 네 옆에 있어줄게. 지켜줄게’라는 마음.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미쓰백’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엄마’답다. 가르쳐줄 것도 없고 줄 것 하나 없지만 옆에서 굳건히 지켜줄 수 있는 것 또한 모성으로 불려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모성은 바로 더 큰 인류애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미쓰백’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여운이 길다. 지은과 장섭 오누이가 아침 밥상에 같이 둘러 앉아있다. 소위 가부장 사회의 이성애자 부부와 자녀라는 정상가족에서 한참 벗어난 그림이다. 장섭과 누이는 남매이지 결혼한 부부가 아니며 이들에게 지은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다. 하지만 아침밥을 함께 먹는 식구인 이들은 바로 가족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 상아는 없다. 섣부른 해피엔딩은 금물.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출소한 상아가 학교 앞에서 지은을 기다리는 모습이 어쩌면 우리에게는 더 현실적인지도. 새로운 가족은 서로를 동등하게 인격체로 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뒤돌아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상아를 지은이 반갑게 ‘미쓰백’이라 부를 때 미래의 가족은 바로 그 순간에 그렇게 시작하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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