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만들어진 여성당
올해 국회 진출 실패했으나
21개 중 8개 광역의회와
58개 기초지방의회 진출

귀두룬 쉬만(Gudrun Schuman)이 주축이 되어 여성당이 만들어진 것은 2005년의 일이다.  그녀가 당을 이끄는 동안 두 번 만난 경험이 있다. 2005년 여성당을 만들기 직전까지 몸담고 있었던 좌익당의 당수로 지지율을 3배나 키워 놓아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을 언론에 고백하고 1년간 당수직을 내려 놓아 충격을 주었다. 부정적 이미지는 오래가지 않았다. 오히려 정직하고 솔직한 정치인으로 각인되었고, 정치를 하며 얼마나 외롭고 힘들면 술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는지 위로하며 그녀를 격려해 주었다. 치료를 마치고 1년 후 그녀는 박수를 받으며 다시 당수로 복귀했다.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61세가 되던 2008년 여름,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스웨덴은 이미 세계에서 성평등이 가장 잘 이루어진 나라로 인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성평등 부분에서 세계 1위를 차지 했다고 완벽한 성평등국가가 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여성 정치인이 전체 국회의원 중45%를 차지하고, 정부 내각의 50%를 여성이 장악했다는 점은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성평등국가를 이르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고 했다. 동일 노동조건을 가진 여성과  남성의 임금 수준 격차는 80% 수준에 머물고, 대기업의 여성임원 비율은 10%에 수준 밖에 이르지 않으며, 가사노동, 육아, 부모출산휴가는 여전히 여성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다고 차분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가정과 직장에서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은 아직도 사회구석 구석에 존재한다고 통계를 보여주며 흥분하기도 했다. 진정한 성평등 사회를 이루려면 기존 정당의 힘으로 불가능하고 새로운 여성당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그녀였다.

2014년 5월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쉬만은 9석 중 1석을 차지해 여성당을 제도권에 진입시키는데 성공했다. 젊은 고학력 여성들이 많은 스톡홀름의 경우 7.4%의 지지를 얻어 큰 가능성을 보였다. 그 해 7월 치러진 고틀란드섬의 알메달렌 정치축제 기간동안 그녀를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녀는 들 떠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국회 진출의 숙원을 꼭 이루겠다고 했다. 젊은 남성 정당원들이 늘어 고무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3.12%의 지지에 그쳐 최저 득표율인 4%의 벽을 넘는데 실패했다. 국회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지방에 큰 바람이 불었다. 전국 290개 기초의회 중 14개에 여성당이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2018년 선거에 반드시 국회에 진출하겠다고 와신상담했다.

2018년 선거는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였다. 21개 중 8개의 광역의회에 진출하고, 299개 중 58개 기초지방의회에 진출하는 등 큰 약진을 이뤘으나, 전국적으로는 1%에도 미치지 못해 국회 진출에 실패했다. 진하게 아쉬움이 남는 선거였지만 결국 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쉬만은 당 대표직을 내려 놓았다. 2005년 여성당 당수가 된 후 올해까지 13년간 당대표직을 유지해 온 그녀가 당을 떠나는 모습에 숙연함이 뭍어난다. 당을 떠나는 그녀의 나이는 이미 71세가 되어 있었다.

쉬만의 여성당 실험은 실패한 것일까? 적어도 절반의 성공은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국회에 진출하는데는 비록 실패했지만, 전국 기초 및 광역의회에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고향인 심리스함(Shimrishamn)을 포함한 58개의 기초의회에서는 2014년 선거에 이어 지지층은 더욱 결속되었다. 극우주의가 팽창하는 시점에서 얻은 젊은 유권자들의 지지였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

젊은 유권자들은 새로운 정당의 출현을 갈망한다. 소수자의 목소리를 잘 대변하고, 젊은 청년들의 아픔에 귀를 열고, 변하지 않는 남성 위주의 기존 정당에 대한 실망감을 희망으로 바꿔줄 그런 정당을.

다 이루지 못한 꿈이었지만 변화를 시도한 쉬만의 도전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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