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사각지대 이별앙심범죄
죽어가는 여성들

가정폭력처벌법 개정해

‘상담조건부 기소유예’ 없애야
20년 미룬 스토킹처벌법 제정도

가정폭력특별법이 시행된 지 정확히 20년이 됐다. 1998년 7월 1일, 가정폭력을 ‘남의 집안 일’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며 국가가 개입해야 할 범죄행위로 규정, 특별법을 시행했다. 특별법은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약칭 가정폭력 처벌법)’과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약칭 가정폭력 방지법)’으로 마련됐다.

법 제정에는 1996년 4월 경기도 시흥시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정모씨가 살인혐의로 구속됐으나 검찰 수사 결과 어머니인 이상희 씨가 자신의 딸을 구타하는 사위를 살해한 것으로 밝혀지면서다. 그러나 20여년 후 한 여성은 청와대 게시판에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 김모씨에게 사형을 선고받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20년 넘게 어머니가 가정폭력과 살해 위협에 시달렸음에도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

가정폭력을 예방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됐을 때만 해도 가정폭력이 더 이상 ‘집안일’이 아니라 폭력 문제로 인식될 거라는 기대감이 컸지만 피해자들은 지금도 국가가 자신을 보호해줄 거라는 희망 대신, 법이 있어도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 있다. 최근 부산에서 일가족 4명이 살해된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전날에는 춘천에서 20대 남성이 신혼집과 혼수문제로 다투던 여자친구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 이틀 전에도 30대 남성이 전남 광양에서 전 부인을 찾아가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

다른 범죄와 달리 가정폭력과 데이트폭력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범죄의 양상은 뚜렷하다. 협박과 보복이 반복되면서 심각한 피해로 이어질 위험도 높다는 점이다. 사법당국의 처벌이 미미하다보니 피해자는 두려워서 신고를 하지 못한다.

김씨의 구속영장을 신청한 서울 강서경찰서는 “과거 가정폭력 혐의로 신고된 사실이 있다”면서 “철저한 계획범죄로 보인다”고 밝혔다.

작년 한 해 범죄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파악된 914건 중 ‘애인, 동거친족’에 의해 살인사건은 263건으로 28.7%에 달했다. 재범율은 2018년 7월 기준 8.7%지만 구속율은 0.8%에 불과했고 기소율은 26.7%에 불과했다. 반면, 가정폭력 가해자 처벌이 아닌 가해자 교정을 위한 ‘보호처분’ 비율은 34%나 됐다.

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기자회견이 열려 참가자들이 국가 가정폭력 대응시스템 전면 쇄신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기자회견이 열려 참가자들이 국가 가정폭력 대응시스템 전면 쇄신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기자

 

이같은 특성 때문에 법 제·개정 요구는 오랫동안 요구돼왔다. 대표적인 것이 가정폭력 처벌법 개정과 스토킹처벌법 제정이다.

가정폭력 처벌법의 대표적인 문제가 ‘상담조건부 기소유예 제도’다. 가정폭력사범이 상담소에서 성실하게 상담받는 것을 조건으로 검사가 기소유예 처분을 할 수 있어 처벌을 무력화한다는 지적이다. 이 제도가 시행된 이유는 가정폭력처벌법의 제정 목적이 ‘처벌’보다는 ‘가정 유지’에 있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처벌법 제1조는 “이 법은 가정폭력범죄의 형사처벌 절차에 관한 특례를 정하고 가정폭력범죄를 범한 사람에 대하여 환경의 조정과 성행(性行)의 교정을 위한 보호처분을 함으로써 가정폭력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가정보호와 유지 관점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목적 조항을 변경하고, 상담 및 교육 조건부 기소유예 제도를 폐지하고, 가정폭력 사건에 대한 화해조정 절차의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 또 가정폭력 범죄에 대해 보호 처분이 아닌 형사처벌을 원칙으로 해야 하고, 임시조치 위반 시 체포 및 형사처벌을 하는 등 피해자로부터 가해자 격리 및 접근금지 조치를 현실화 해야 한다고 한다. 이밖에 피해자에게 처벌 의사를 묻는 반의사불벌죄도 폐지돼야 한다.

스토킹처벌법 제정은 20년 째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999년 국회에 처음 입법 발의됐지만 매번 국회에서 임기만료 폐기된 후 발의를 반복하고 있다. 20대 국회에도 스토킹 관련 법안만 5개가 계류돼 있다. 남인순·김정훈·정춘숙·이동섭·추혜선 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들이다. 이 법안들은 스토킹 범죄자의 처벌을 강화하고, 초동 단계부터 법적 제재를 가해 범죄를 예방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당선 직후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에서도 불평등한 성별 관계에서 발생하는 신체적·성적·정서적 폭력을 ‘젠더폭력’으로 규정하고 젠더폭력방지기본법 제정 등을 제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당정은 스토킹범죄처벌특별법을 정부안으로 발의하겠다는 계획을 지난 2월 마련했으나 법안은 당초 취지에서 많이 후퇴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처벌법 제정이 이뤄지면 스토킹 피해자 법적근거와 데이트폭력 처벌 강화를 위한 사건처리기준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기 때문에 실시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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