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창작’을 말하다] “사람들은 노련한 할머니 영웅을 보고 싶어 해요”
[‘여성-창작’을 말하다] “사람들은 노련한 할머니 영웅을 보고 싶어 해요”
  • 이하나 기자
  • 승인 2018.10.29 15:24
  • 수정 2018-11-14 2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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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력’을 남성의 전유물로 간주해온 신화 앞에서 ‘펜은 곧 페니스인가?’라는 질문을 거듭해야 했던 여성의 역사는 길다. ‘왜 위대한 여성예술가는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누가, 무엇을 예술이라고 규정하는가’라는 권력에 대한 물음으로 고쳐 써야 한다는 항변도 이미 존재한다. 이 코너에서는 ‘여성-창작-새로움’의 의미망을 확장·갱신하기 위해 도전하는 동시대 젊은 여성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과 여성신문이 공동 기획한 이 인터뷰는 문화연구자 오혜진과 만화평론가 조경숙이 함께 총 10회에 걸쳐 진행한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 - 여성신문 공동기획

[‘여성-창작’을 말하다] ⑥ 페미니스트 게이머 모임 ‘페이머즈’를 만나다

여성게이머들은 게임을 하면서 늘 욕설과 성희롱에 노출된다. ‘여자는 때려야 제맛이지’, ‘벗어 OO아’ 모두 여성게이머가 실제로 접한 말들이다. ‘페이머즈’는 이러한 게임문화에 반기를 든 페미니스트 게이머 그룹으로, 게임문화를 비판하는 게임까지 개발했다. 페이머즈가 직접 게임을 개발했다는 말에 내가 다소 놀라자, 페이머즈 활동가 ‘영운’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무언가를 집중하고 좋아하게 되면 결국 창작자가 된다고 하잖아요?” ‘창작자’가 된 게 당연했던 여성들, 페이머즈 활동가 총 10명 중 2인, ‘영운’과 ‘보보’를 만났다.

영운과 보보가 페이머즈 사무실에서 게임을 즐기고 있다.
영운과 보보가 페이머즈 사무실에서 게임을 즐기고 있다.

 

 

“숨 쉬듯이 게임을 했어요”

조경숙(이하 ‘조’): 두 분은 게임을 언제부터 즐기게 되셨나요?

영운(이하 ‘영’): 유치원 때 ‘패미컴(게임팩을 꽂아서 플레이하는 게임기)’이 교구로 들어와서, 그때부터 시작했어요. 만화 채널과 게임이 초등학생 시절 제 인생의 전부였어요. 타자게임이나 지뢰 찾기는 물론이고, 온라인 게임부터 CD 게임까지… 숨 쉬듯이 게임을 했어요.

보보(이하 ‘보’): 제가 십대였던 2000년대 초반에는 실험적인 게임이 많았어요. 예를 들어 <써니하우스>라는 게임은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집 인테리어를 하는 게임인데요. 몬스터를 잡아서 특정한 재료를 얻으면 그 재료로 가구를 만들어 인테리어를 하는, 독특한 게임이었어요.

조: 게임을 즐기는 것이 당시 또래문화의 일부였나요?

영: 처음에는 남녀 친구들 모두 게임을 좋아했죠. 그런데 게이머들끼리 총을 쏘며 대결하는 슈팅 게임을 하게 되면서 여자친구들이 게임에 흥미를 잃었어요. 슈팅 게임은 다른 게임보다 연습이 많이 필요해서 난이도가 높은 편이에요. 그뿐만 아니라 같은 팀끼리 그룹 통화를 하면서 플레이하는 경우가 많은데, 통화 목소리에서 게이머가 여자라는 게 드러나면 다른 남성 게이머가 싫어하기도 합니다. 목소리가 예쁘다며 질척거리기도 해요. 게임을 하면서 성차별을 많이 경험하게 되니까 아무래도 슈팅 게임할 때부터 여자친구들이 게임을 즐기지 않게 되더라고요.

 

‘당신은 그만 컴퓨터를 부수고 말았다’

조: ‘페이머즈’가 개발한 게임 <컴퓨터를 부수는 101가지 이유>도 슈팅 게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게임문화가 성차별적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이해돼요. 게임을 하겠다고 선택지를 눌렀을 뿐인데, 게임의 채팅창에 욕설들이 뜨더라고요. 그런 뒤 “당신은 (화가 나서) 그만 컴퓨터를 부수고 말았다”라는 자막이 딱 떴어요.

영: ‘옵치하는 여자들’이라는 트위터 계정을 운영했었어요. 슈팅 게임 <오버워치>를 플레이할 때 여성게이머들이 접하는 성희롱 사례들을 제보 받아서 아카이빙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지금은 ‘옵치하는 여자들’ 계정을 ‘게계여고(게임계 내 여성혐오를 고발합니다)’로 이름을 바꿔 오버워치뿐만 아니라 게임계 전반의 여성혐오 사례를 제보 받고 있고요. 이렇게 수집한 경험들을 토대로 여성게이머들이 게임을 할 때 어떤 경험을 하는지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게임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어요.

조: 제보 받은 내용들을 그대로 보여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을 ‘게임’이라는 형태로 만드신 이유는 뭔가요?

영: 여성게이머의 실제 경험을 더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었어요. <컴퓨터를 부수는 101가지 이유>에서 제시되는 선택지를 고르다 보면 성희롱을 당해서 게임이 바로 종료되기도 하고, 운 좋게 즐거운 기분으로 게임을 끝낼 때도 있어요. 딱 한 판만 해서 좋은 경기로 끝날 가능성은 꽤 높아요. 하지만 게이머들이 보통 게임을 딱 한 판만 하진 않잖아요. 한번 게임을 시작하면 계속 이어나가는데, 운 좋게 한두 번 잡음 없이 게임을 즐긴다 해도 다음 게임에서 내가 성희롱을 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죠. 그런 식의 경험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컴퓨터를 부수는 101가지 이유>는 몇 번의 선택만으로 게임을 마치게 하지 않고, 계속 같은 과정을 반복하게 해요. 실제 게임을 할 때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긱(Geek)’한 여자가 여기 있다

조: 여성게이머들은 늘 ‘진정한 게이머’인지 아닌지를 의심 받습니다. 이런 모습은 스포츠와 닮았어요. 축구를 함께 보면 꼭 옆에서 ‘오프사이드’가 뭔지 설명해주려는 남자들처럼, 여자가 게임을 아무리 잘한다 해도 늘 남자들은 옆에서 훈수를 두려 해요.

보: 피시방에서도 똑같이 제가 게임을 하고 있으면 뒤에서 남자들이 팔짱 끼고 보곤 해요. 남자 초등학생들도 뒤에 서서 ‘아 저렇게 하는 거 아닌데’라고 다 들리게 수군거리고요.

영: 사실 게이머의 진정성은 정품을 구입하는 것 아닌가요? 어떤 게임을 하는지로 게이머의 진정성이 판가름될 수 없다고 봐요. 하지만 유독 여성에게는 그런 잣대를 들이대지요. 남성게이머의 존재는 당연하게 생각되고, 그러다 보니 ‘게임을 잘한다’는 것조차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특성으로 여겨져요. 게임을 잘하는 여성은 게임 커뮤니티에서 ‘넌 우리랑 같이 놀아도 괜찮아’라고 남성게이머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뿐이에요.

조: 하지만 여성게이머로서 소위 ‘인정’ 받았다 하더라도, 남성게이머들에게 게임실력을 검증받죠.

영: 맞아요. 그뿐만 아니라 여성게이머는 게임을 아무리 잘하더라도, 남자들처럼 ‘긱(Geek)’이 될 수는 없어요. ‘긱’은 본래 이과나 공대 남성들이 괴짜처럼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데요. 여성은 공대생이더라도 괴짜 같은 모습을 보이면 안 돼요. 늘 방긋방긋 웃어야 하죠. 하지만 여성들도 얼마든지 ‘긱’할 수 있거든요. 이런 시도를 보여준 게 미국의 ‘긱 걸 콘(Geek Girl Conference)’이에요. 여성들이 주도해서 여는, 일종의 오타쿠 문화 체험 박람회입니다. 페이머즈에서도 ‘긱 걸 콘’을 열고 싶었어요. 하지만 일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행사를 먼저 열어보자는 취지로 2017년 11월, ‘펙타(FeGTA: FEMI-GAMERS Take Action)’라는 토크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페이머즈의 영운과 보보가 홍대 인근 카페에서 인터뷰 후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페이머즈의 영운과 보보가 홍대 인근 카페에서 인터뷰 후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리니지>에서 멈춘 한국 게임업계의 시계

조: ‘펙타’에 여성 게임개발자를 초대하셨어요. 여성 게임업계 종사자들은 SNS 검열은 물론 그에 따른 부당한 노동 탄압을 당하기도 합니다. 한 게임회사는 여성 직원이 여성단체 트위터 계정을 팔로우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직원을 불러다 얘기하고는 면담 내용을 합의 없이 공개했죠.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게임 회사가 이미 게이머들을 반여성주의적인 남성들이라고 상정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페이머즈가 여성 게임개발자와 게이머의 만남을 연 건 여성 게이머-게임개발자 간의 페미니즘적 연대로 읽혔습니다.

보: 좋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게이머들이 개발자들에게 피드백을 직접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과정에서 여성게이머들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것도 ‘펙타’를 기획한 목표 중 하나였고요. 게임을 만드는 사람과 즐기는 사람 간의 상호작용이 있어야 게임업계도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조: 우리나라 게임산업은 주로 대기업인 게임회사가 게임의 유통과 홍보를 맡고 소규모 게임 제작사가 개발하는 구조입니다. 이런 구조가 게임 제작사와 게이머 간의 소통을 단절시키는 데에 일조하고 있어요. 배급을 맡고 있는 대기업들이 기획과 제작 단계에서부터 게임 제작사에 간섭하다 보니, 게이머들의 피드백을 제작사가 직접 듣고 게임에 반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배급사의 눈치가 보이니까요.

영: 맞아요. 일단 배급사가 돈이 되는 게임만 출시하려 하니, 개발사가 게이머들의 피드백을 듣기가 더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게임회사들은 <리니지>에 멈춰 있는 것 같아요. 과거에는 실험적인 게임들도 많이 출시했는데, 이제는 성공했던 게임들을 모방하기만 해요. 그래서 똑같은 게임들만 계속 출시됩니다. 하지만 상업적 성공만을 목적으로 만든 <서든어택2>는 시장에서 외면당했어요. 결국 그 원칙도 언제나 들어맞지는 않는 거예요.

조: 그래도 게임업계가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조짐이 보이시나요?

보: 세계 최대의 게임쇼인 E3에서 비디오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2> 트레일러가 공개됐는데, 영상에서 여성주인공이 다른 여성캐릭터와 키스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신작 게임의 트레일러가 나왔으니 일반적으로는 관중들이 환호하고 박수치는데, 이 영상이 끝나고서는 관중들이 모두 침묵하더라고요. 게임의 주인공이 레즈비언이라고 분개하는 온라인상의 여론도 있었어요.

조: 주인공이 레즈비언이라 화를 냈다고요? 대체 이유가 뭔가요?

영: 저야 모르죠. 알고 싶지도 않아요.(웃음) 하지만 이런 캐릭터들이 등장한 건 여성 게이머들이 가시화되고 그들이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게임업계 역시 매우 느리지만 진보하는 거죠. 물론 소수자성을 특정 캐릭터에 부여한 뒤에 그런 설정을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하지만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니까, 그런 게임이라도 많이 나와야죠.

세상을 바꾸는 ‘할머니 영웅’

조: 지난 3·8 여성의 날에 부스행사로 기획하신 이벤트 <내 게임의 진짜 주인공은 너였어!>는 정말 흥미로웠어요. ‘지하세계 최강자보다는 우주 최강자가 좋다’ ‘천부적인 초능력보다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일군 능력이 좋다’ ‘날카로운 숏 컷보다는 풍성한 긴 머리가 좋다’ 등 다양한 문항들에 ‘예/아니오’로 답하다 보면, 내 취향에 맞는 여성캐릭터 카드를 받을 수 있는 오프라인 게임이죠.

영: 맞아요. 그 카드 시리즈는 게임을 잘 모르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거였어요. 게이머가 아닌 사람들도 게임에 좀 더 편안하게 다가왔으면 해서요. 인간형도 있고 동물형도 있고, ‘소녀’부터 ‘할머니’까지 다양한 여성캐릭터를 선별하여 카드로 만들었죠. <오버워치>의 ‘아나’ 캐릭터가 가장 빨리 소진됐어요. ‘아나’는 장애가 있는 노년의 여성 캐릭터예요.

보: ‘아나’의 얼굴은 젊은 여성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나’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 여성에 가까워요. 이 게임에서 ‘아나’ 캐릭터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는 건 사람들이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 중년, 혹은 노년 여성 캐릭터가 세상을 바꾸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거죠. ‘노련한 할머니 영웅’이요.

슈팅게임 <서든어택2>의 여성캐릭터의 연령은 모두 20~30대이고, 비디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의 주인공 ‘엘리’는 열네 살이다. 어린 여성이 선호되는 게임세계에서 장애가 있는 노년 여성 ‘아나’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아나’는 전투 수트를 갖춰 입고, 동료들을 치료하는 강인한 여성캐릭터다. 사람들이 ‘할머니 영웅’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건, 여성이 현실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남기를 바란다는 뜻 아닐까. ‘아나’는 말한다. “연륜도 멋도 내가 앞서는데? 풋내기가 낄 곳이 아니야.”

* 페이머즈(FAMERZ): 페미니스트 게이머 모임. 슬로건은 ‘미래의 페이머즈(Female-gamerz)를 위해 현재의 페이머즈(Feminist-gamerz)가 뛴다’. 대안적인 게임문화를 만들기 위해 게임을 즐기고 만든다.

►[‘여성-창작’을 말하다] ① 웹툰 <먹는 존재>, <족하>, <홍녀>의 작가 ‘들개이빨’
http://www.womennews.co.kr/news/144017

►[‘여성-창작’을 말하다] ② 소설집 『쇼코의 미소『내게 무해한 사람』의 작가 최은영
http://www.womennews.co.kr/news/144347

►[‘여성-창작’을 말하다] ③ 영화 <소공녀>,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영화감독 전고운
http://www.womennews.co.kr/news/144611

►[‘여성-창작’을 말하다]  ④ 페미니스트 드랙 아티스트 ‘드랙킹 아장맨’
http://www.womennews.co.kr/news/144790

►[‘여성-창작’을 말하다] ⑤ IT업계 페미니스트 모임 ‘테크페미’
http://www.womennews.co.kr/news/144971

 

* 조경숙  만화평론가. <주간경향>에 ‘만화로 보는 세상’ 칼럼을 연재한다. <코믹스 페미니즘: 웹툰시대 여성만화 연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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