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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여성관객이 뽑은 최고·최악의 영화에 대해 논란이 벌어진 한 사이버 토론장을 보면서 많이 씁쓸해 했던 기억이 있다. 최악의 영화로 선정된 작품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공인된 작품성 있는 영화 앞에 말도 안 되는 평가’라며 더불어 최고의 영화로 뽑힌 영화들에 대한 비판까지 서슴지 않았다. 대중적 평가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던 <오아시스>와 <나쁜 남자>라는 두 영화 앞에 ‘최악’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한가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그 시각은 개인의 가치관일 수도 있고 하나의 이즘일 수도 있다. 따라서 하나의 사회적 이슈가 떠오를 때 그것에 대해 한 성격을 가진 여론이 형성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소수의 의견을 가린 채 빛을 발하고 있는 다수의 의견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이 ‘다수의 의견’에서 비롯된다. 만약 가려져 있는 소수의 의견이 진정 곱씹어봐야 할 문제라 해도 다수의 목소리는 좀처럼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대중적인 문화 속에서 왜곡된 여성의 모습이 표현될 경우 더욱 그러하다. 가부장적 가정생활의 단면과 남성 우월주의의 모습이 일상적 표현의 아름다움과 행복함으로 미화돼 찬사를 받고 있는 작품이라면 ‘작품’과 ‘평가’ 두 가지 모두 잘못된 성 역할 고정관념의 확대, 여성의 삶에 대한 왜곡과 같은 큰 폭력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옹호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해서 공인된 어느 영화제가 그 작품에게 상을 주었다고 해서 긍정적으로 그 작품을 봐야 마땅하다는 ‘행복한 사고방식’은 언론은 물론 진보적 문화라고 평가받는 사이버 토론장에서도 자취를 감출 줄 모른다. 국가적 유대감과 새로운 선거문화의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 인터넷이지만 개인의 가치관과 사고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근본 문화를 형성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너무 먼 것일까. 그릇된 고정관념의 재생산은 언제쯤 그칠 것인가. 지금 이 시각에도 다수의 ‘당연한 목소리’에 가려져 있을 여성의 목소리가 아쉽게 느껴진다.

최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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