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꿈으로 돌아가게 하는 마술의 문

@22-1.jpg

지난 2002년 막바지 출판계는 그동안 문학시장의 주축이 돼 왔던 2만∼3만부 대의 본격 문학시장이 거의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잦았다. 주목받을 만한 작품의 출현이 없었던 이유도 있으나 실용서적과 대중문학서적 코너로 발길을 돌리는 독자들의 변화된 취향 탓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순수 문학시장의 위축에도 불구하고 ‘어른을 위한 동화’는 요 몇 년간 꾸준히 독자층을 늘리고 있다.

동화라 하면 당연히 어린이들의 전유물로만 취급돼 왔던 정서에 비해 그동안 출간된 어른을 위한 동화들은 시와 산문이라는 그릇에는 담을 수 없는 남다른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한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돼 서점가에서 당당히 지정 코너를 차지하는 이들의 매력은 무엇일까.

상처를 치유해 주는 명약

동화가 한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며 고통의 승화라는 점에서는 다른 문학장르와 다를 바가 없다. 신경정신과 김병후 박사는 안데르센 동화를 예를 들어 “독자들은 어린 시절 그의 동화를 읽으면서 삶의 제한점을 인식하고 한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정서적으로 성숙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천재작가 안데르센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라고 말했다. ‘동화는 어린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라고 했던 안데르센의 말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어른들에게도 동화는 유년의 꿈으로 돌아가게 하는 마술의 문이며 상처를 치유해주는 명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데미안>, <유리알 유희>로 이미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헤르만 헤세도 동화나 우화를 많이 썼다. 헤세의 동화 26편을 묶어 낸 <환상동화집>(원제:동화/ 민음사)은 ‘내면성의 추구, 정신분석학적인 무의식 세계로의 진입, 소외된 예술가의 고뇌, 자연친화적인 노력 등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명랑하고 해학적인 유머가 담겨있다’고 역자는 말한다. 1차 대전 전후 힘든 시련을 겪으며 심리치료를 받던 헤세는 동화라는 환상세계를 통해 영혼의 치료를 얻고 나아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술사의 어린 시절>이란 작품은 세상이 온통 마술로 가득한 것 같던 유년기의 순수함이 어른이 돼가면서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해 가는 안타까움을 그리고 있다. 유년기의 꿈을 이루어주던 ‘꼬마’는 요정과 악마의 속성을 다 지닌 존재, 그의 출현은 언제나 흥미롭고 경쾌하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꿈과 소망이 시들어가자 ‘뭔가 제한된 어른들의 세계’가 다가온다. 마법의 ‘꼬마’는 성년이 되어서도 피부 밑에 숨어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동화는 말한다.

우리 작가 중에는 전문 동화작가보다 시나 소설을 쓰던 작가의 작품이 많다. 안도현의 <관계> <짜장면>, 김성동의 <뻬뻬>, 정호승의 <항아리> <모닥불> <연인>, 최근에 출간한 한강의 <내이름은 태양꽃>과 한승원의 <우주 색칠하기>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이들 작품에는 나무와 염소, 꽃, 새, 항아리, 종과 같은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이 잔잔히 그려져 있다.

이들 중 어른을 위한 동화로 대중적인 사랑을 얻고 있는 작가로는 단연 정호승 시인을 꼽을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의 동화에는 맑은 물줄기로 정화되는 순백의 마음이 곳곳에 포진돼 있다. 열림원에서 나온 <항아리>에는 일곱 편의 짧은 동화가 실려 있다. 표제작 <항아리>에서 항아리는 자신이 오줌통으로 쓰인다는 사실에 속이 상하지만, 봄이 되어 배추를 싱싱하게 자랄 수 있도록 오줌을 뿌려주게 돼 기뻐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어느 절 종각의 종 밑에 묻힌다. 종이 울릴 때마다 소리를 받아내던 항아리는 범종의 음관 역할을 함으로써 종이 보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낸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 의미이자 가치임을 깨닫는다.

<모닥불>(현대문학)에서 작가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랑에는 왜 반드시 고통이 따르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담아냈다. 23편의 짧은 이야기들 중 <상처>라는 작품에서 ‘남한테 준 상처가 바로 너의 상처야’라는 구절을 가장 빛나는 구절로 뽑은 안도현 시인은 “정호승의 동화가 인간의 마음 안쪽에 깃들인 사랑의 본질적 의미를 캐는데서 출발하여 고요한 깨달음의 길로 독자를 인도한다”고 애정 어린 표현을 했다.

<연인>(열림원)은 전라남도 운주사 대웅전 서쪽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 모양의 풍경, 푸른툭눈과 검은툭눈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검은툭눈의 사랑이 식었다고 느낀 푸른툭눈이는 어느날 비어(飛魚)가 되고 싶어 풍경에서 떨어져 나온다. 흰물떼새와 소녀의 죽음을 목격한 푸른툭눈이는 사랑의 본질이 희생이 아닐까 생각하고 다시 운주사 대웅전 처마 끝을 찾는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바람을 맞아 청아한 소리를 내는 풍경처럼, 한 시대의 풍파를 견뎌내는 사람들에게 서로의 풍경이 되어달라”고 당부한다.

동화의 매력은 호수와 같다. 큰 파도와 같은 격정은 없지만 미미한 바람에도 잔물결을 만들어 화답하는 호수처럼 마음의 처마에 풍경을 달아준다. 새해에는 부디 맑은 바람이 불어와 사람들 마음속에 청아한 풍경소리가 울려 퍼지길 바란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풍경달다>

윤혜숙 객원기자 heasoo21@yahoo.co.kr

cialis coupon free cialis trial coupon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