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대선 민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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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충청을 잡으면 이긴다.”

제16대 대통령선거 선거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주요 후보들의 표잡기 경쟁이 뜨겁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부산·경남(PK)과 대전·충청 지역이 승부에 결정적인 몫을 할 것이란 당 안팎의 분석에 따라 이 지역을 상대로 혈전을 벌이고 있다.

두 후보는 최근 주말을 이용해 이 일대를 두루 돌면서 유세를 했고, 선거일 전까지 두어 번 더 찾아갈 작정이다. PK와 충청권은 이번 대선 최대의 승부처이면서도 여전히 부동층이 많은 곳으로, 선거 당일까지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이다. 본지가 ‘격전지’ 유권자들의 표심을 알아보기 위해 6~7일 현장을 가봤다.

6일 낮 부산은 차분했다. 시민들은 진지했고 말을 아꼈다.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지지 후보를 선뜻 밝히는 이도 거의 없었다. 대신 약속한 듯 ‘될 사람’이 되지 않겠냐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게 누구냐는 물음에도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여긴 부산이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

정확히 말하면 부산은 (박빙의 승부를 겨루는) 격전지가 아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당의 ‘텃밭’인 이곳에서 70%이상 표를 얻느냐,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그동안의 ‘왕따’를 극복하고 35% 벽을 넘어서느냐가 관건인 곳이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이 목표치를 넘겼다고 장담하고 있다.

낮 3시께 중구 남포동 자갈치시장. 노 후보가 막 유세를 마치고 돌아간 뒤여선지 상인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뤄 선거 얘기에 한창이었다. “이번에는 바꿔야 한다 아이가.” “바꿔보믄 뭐 하겠노, 거기서 거긴기라.” 저마다 목청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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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옥씨

“그런 건 뭐하러 묻노. 누구한테 투표할지는 자기만 아는기제.” 30년 넘게 자갈치시장을 지켜온 ㅂ상회 김명옥(50)씨. ‘누굴 지지하느냐’는 물음에 당혹스러운 듯 답을 피했다. 화제를 바꿨다. ‘장사는 잘 되느냐.’ “지난 5년동안 완전히 망해버렸다”며 김씨가 말문을 텄다.

“한나라당 물만 튀어도 된다”

“지금 시장을 돌아보라. 손님이 하나도 없잖냐. 선거철이라 그런 탓도 있겠지만, 지난 몇 년동안 거의 이랬다. 경제가 완전히 망한거다. 지금 정부가 잘 했으면 이렇게 됐겠냐. 호남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영남 경제는 완전히 죽었다.” 하나둘 몰려든 주변 상인들도 비슷한 푸념을 늘어놨다.

자리를 다른 쪽으로 옮겨 시장 입구쪽으로 가봤다. ㅅ상회 최경숙(43)씨. 최씨는 “하늘을 찌르는 세금과 사교육비 때문에 도무지 살맛이 안난다”고 말했다. “국민연금만 10만원이 넘고, 아이들 학원비도 한 달에 60만이나 든다. 외환위기 뒤로는 장사도 통 안된다. 장사한 지 40년이 넘은 부모님들도 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외환위기는 김영삼 정부 때 터진 일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 뒤에 잘 했으면 이렇게까지 됐겠느냐”는 최씨에게 ‘그럼 누가 경제를 잘 풀 것 같냐’고 넌지시 속을 떠봤다. “이 후보나 노 후보 모두 사람은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제문제를 풀려면 경륜과 배경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최씨는 “부산 사람들은 대부분 이회창”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이는 없냐고 물었다. 모두 이일순씨를 꼽았다. 노무현 후보 텔레비전 찬조연설자로 출연했던 ‘자갈치 아지매’다. 웬일인지 이씨는 가게문까지 닫고 자리에 없었다. 동생과 이모가 대신 기자를 맞았다.

‘텔레비전 출연한 뒤에 하도 시끄러워 좀 쉬러 갔다’는 게 가족들의 설명이었다. 텔레비전 출연 뒤 격려전화와 취재요청이 몰려들어 장사도 힘들었고, “당신 도대체 어디 사람이냐”는 협박전화도 적잖이 받았단다.

동생 이아무개씨는 막판 “자갈치시장 조합장이 현직 한나라당 의원이라 알게 모르게 힘들다”면서도 “그래도 낡은 정치를 깨려면 소신과 패기 있는 노 후보가 더 낫지 않냐”고 귀띔했다. 주변 상인 몇몇도 돌아서는 기자를 붙잡고 이씨 편을 들었다. 묘한 분위기였다.

상승세 타는 ‘노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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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관식씨

밤 7시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인다는 서면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자갈치시장의 ‘친한나라 성향’이 대세냐고 물었다. 운전경력 20년째인 최관식(50)씨가 간단히 답했다. “여긴 한나라당 물만 튀어도 된다 아입니까”.

“영남 사람은 노 후보 아닌가요.” 되물었다. “민주당 깃발만 안 들었어도 벌써 몇 번은 당선 안됐겠능교. 여긴 경상도라예.” 고질적인 지역감정이 되살아나는 걸까. 최씨가 답했다. “글쎄, 그게 지역감정인가...지난번 대선 때도 그랬고, 뭐 계속 그래왔는데...” 젊은이들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다. “서면에 가 보시소.”

서면은 서울의 명동 같은 곳이다. 대형 백화점을 중심으로 돼지국밥집과 순대노점상, 옷가게 등 갖가지 상점들이 몰려있는 소비 중심지다.

밤이 깊어가면서 주말을 즐기러 나온 젊은이들로 거리는 금새 만원이다. 어른들이 이 후보 지지 성향이 강한 반면, 젊은이들은 노 후보를 지지하거나 아예 무관심한 두 갈래로 나뉘었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이름 밝히길 싫어한다는 것.

부산대생 강영걸(24·가명)씨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다”고 당당히 밝혔다. 이유를 묻자 “젊고 소신있고 활기차다”고 답한다. 이 후보는 어떠냐고 물었다. “깐깐해 뵈고, 그냥 싫습니다.” 대학생들은 권영길 후보를 좋아하지 않냐고 다시 물었다. “심정적으로는 그런데 표는 노 후보한테 찍을 것 같습니다.” 이날 오후 서면에 노 후보가 유세를 다녀갔다. 혹시 가봤을까. “텔레비전, 인터넷으로 다 보는데요, 뭘 일부러 가서 봐요?”

서면을 지나는 수많은 이들 대부분은 이런 식이었다. 각 후보들이 ‘무관심층’으로 불리는 젊은이들에게 쏟는 엄청난 공에 견줘, 이들의 선택기준은 간결하고 정확했다. 김미영(25·가명)씨는 “정치인들 신물나고 재수없어요. 투표 안 할 거에요.” 선거 때 여성관련 정책들이 공론화되고 여성의 지위를 높일 절호의 기회도 되지 않냐고 물었다. “그렇게만 됐으면 지금쯤 여자 대통령 나왔게요?” 한 시간 남짓 만난 이들 10명 중 3명꼴은 김씨와 같은 부류였다.

부산 ‘본심’은 역시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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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례씨

‘블루스바인’이란 재즈바에 들어갔다. 회사원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물었다.

“부산은 전통적인 한나라당 텃밭입니다. 노풍이 세다지만 여기서 이 후보를 이기긴 힘들거에요. 한 30% 정도 얻으면 성공이라더만.” ‘노 후보를 지지하나요.’ “권영길 후보를 지지합니다. 386세대나 그 뒤 진보세대의 의무라고 봅니다. 그래야 세상이 바뀌죠.” 회사원 김영욱(32)씨와의 문답이다. 같은 젊은이라도 20∼30대 사이에 적잖은 차이가 있었다.

9시가 다 됐는데도 롯데백화점 앞 노점상 거리엔 손님이 별로 없었다. 12년 노점을 했다는 허순례(45)씨는 “텔레비전토론 하는 것 보고 노 후보로 바꿨다”며 “여기 노점상들은 대부분 노무현 찍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아무래도 서민적인 분위기가 풍기고 우리같은 사람들한테 잘 해줄 것 같아서”란다. 문을 연 노점은 20개가 채 안됐다.

다시 서면 지하철역 들머리로 돌아왔을 때 미선이와 효순이를 추모하는 촛불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밤 10시를 넘은 시각이었다. 300여 명 정도 모였고, 사람들은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중학생 고보람(13)양은 “새 대통령은 미순이와 효순이처럼 억울하게 죽는 친구가 생기지 않게 해 달라”고 눈물을 훔쳤다.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 서면과 달리 중장년이 많이 찾는다는 근처 부전시장 주점가는 한산했다. 자정이 가까워도 썰렁했다. 맥주집 주인 노영란(42)씨는 “올 초부터 장사가 안됐는데 선거철이 시작되면서는 아예 손님 발길이 끊겼다”고 말했다.

권씨는 취객 서넛을 보낸 뒤 새벽 1시께 문을 닫았다. 그러면서 뼈있는 소리를 한 마디 덧붙였다. “투표를 안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여기 오는 손님들은 거의 이회창 지지파라예. 개중에 노무현이나 권영길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얘기 하면서도 괜히 주눅든다 아잉교. 어차피 여긴 부산이니까예.”

배영환 기자 ddarijoa@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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