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잡지 <에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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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알리스 슈바르쳐(Alice Schwarzer)라는 이름은 한 여성의 이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내가 독일 쾰른의 여성운동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그 도시에 살고 있는 몇몇 여성들을 만나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인터뷰 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알리스 슈바르쳐였다. 이 여성들은 “쾰른에 알리스 슈바르쳐가 살고 있으며,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다”라고 몇번씩 강조하곤 했다.

이처럼 독일에서 여성운동의 대명사로 더 나아가서는 여성들의 자부심으로까지 여겨지는 알리스 슈바르쳐는 1942년 12월 3일 알리스 소피 슈바르쳐라는 이름으로 독일 중부지역에 위치한 부퍼탈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미혼모였으며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그녀는 담배가게를 운영하는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해 그녀는 “자상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내가 여성적 또는 남성적으로 자라도록 강요하지 않았다”고 회고하곤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광고회사에서 비서로 일하던 알리스 슈바르쳐는 1963년 다른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파리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녀는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봐르를 만난다. 다양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그녀는 1966년까지 파리에 머물면서 어학과정을 마친다.

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독일에 돌아온 그녀는 기자를 양성하는 언론대학(JournalistInnen-Schule) 입학시험에 참여하지만 낙방하고 만다. 지방신문과 몇몇 진보잡지에 리포터로 활동을 하던 알리스 슈바르쳐는 프랑스의 여성운동이 활발해지던 1970년 파리로 돌아가 여성권리쟁취, 반 자본주의 운동에 참여한다. 1971년 프랑스의 저명한 여성들이 자신의 낙태경험을 밝힌 기사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에 영향을 받은 알리스 슈바르쳐는 독일잡지에 “나도 낙태를 한적이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다. 이 기사에서 독일의 여성 정치가, 작가 등 소위 저명인사로 알려진 374명의 여성들은 자신의 낙태경험을 밝혔다. 이 기사는 그 당시까지 독일에서 금기시 돼왔던 여성의 낙태문제를 공개적인 토론의 장에 올려놓은 업적을 낳았다.

사회적으로 소외돼 왔던 여성문제들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을 기자의 소명으로 여기고 활동하던 알리스 슈바르쳐는 기존의 보수적 언론사와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한 TV 인터뷰에서 그녀는 여성관련기사에 소극적 자세를 취하는 언론사들을 접하면서 여성 전용 대중매체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밝혔다.

그녀는 1977년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페미니스트 잡지 “에마”를 출간한다. 잡지 “에마”는 현재 독일의 많은 여성들로 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기자로 그리고 여성운동가로 ‘성공적인’삶을 살았던 그녀가 아직 소망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최근 발표한 그녀의 책에서 그녀는 “한 인간이 남자 또는 여자, 백인 또는 흑인, 뚱뚱한 사람 또는 날씬한 사람으로 구분되어지지 않는 사회를 꿈꾸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인간이 성이나 인종으로 구분되어지지 않는 사회, 한 인간의 장점과 단점, 희망과 공포, 감정과 이성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그녀의 ‘마지막 꿈’인 것이다.

그녀의 꿈, 그리고 세계의 모든 여성들의 꿈이기도 한 이런 사회가 현실이 되어지는 때를 그녀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다시 한번 머리에 그려본다.

조한나 독일 통신원 hannahcho@gmx.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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