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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동생이 차린 양장점 한구석에서 시작한 이리자한복

남편이 동대문상업고등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 남편의 동기동창인 장

태섭이라는 분이 경일중고등학교를 설립한다고 하면서 남편에게 교장

을 맡으라는 제의를 해왔다. 경일중고등학교면 지금의 대일외국어 고

등학교를 말한다. 그래 돈은 그 분이 대고 남편이 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나는 덩달아 교장 사모님이 되었다. 내 나이 서른하

난가 되었을 때다.

그러나 나는 삯바느질을 계속 했다. 월급이 많지 않았고, 애들 셋

을 키워야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학교 주위에서, 특히 이사장 부인

이 교장 마누라가 삯바느질한다고 못마땅해 하며 말이 많았지만 나로

서는 그게 좋아서, 필요해서 하는 일이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남편은 교장 노릇을 한 사오년 했다. 너무 자금이 없는 상황에서 학

교를 크게 세우고 하더니 나중에는 부도가 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

금 대일중고등학교 이사장이 아마도 관선 이사로 들어올 때 인수한

것으로 안다.

그 무렵에 나는 한복 가게를 냈다. 남편이 교장이 되기 전, 답십리

시절에 이미 나는 집에서 한복을 짓고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해입고 다니는 옷을 본 사람들이 자꾸 지어달라고 하길래 하나둘 시

작한 게 그 무렵에는 거의 본격적인 업으로 바뀌어 있었다. 1968년에

나는 답십리 사촌동생의 양장점 한구석을 빌려서 내 한복 가게를 냈

다. 한복 디자이너 이리자의 시발점이었다.

답십리에서 가게를 낼 때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다. 한 사람은 지금

동아제약 방회장댁 부인이고 또 한 사람은 남대문 시장의 보석가게

하던 규준이 엄마라는 이로 둘 다 우리 막내의 친구들 엄마였다. 내

가 그분들의 이런저런 일들을 도와 준 데다가 특히 방회장댁 부인은

옷도 만들어 주곤 했었다. 그 양반들이 나보고 재주가 많다고 자기네

들이 50만원씩 보태 줄테니 가게를 차려보라는 것이었다. 그때 남편

월급이 50만원이었다.

그 때 마침 결혼을 앞둔 사촌동생이 답십리에 양장점을 하나 냈었

다. 그래 걔 혼수도 할 겸 나는 방 한귀퉁이를 차지하고 들어간 것이

다. 한복은 어쨌든 앉아 바느질할 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게는

냈는데 어떻게 알려야 할까. 나는 궁리 끝에 양장점 쇼윈도우의 마네

킹에 한복을 입혀 놓았다. 지금도 마네킹은 얼굴이 영락없는 서양 사

람인데, 눈썹이 긴 걸 좀 끊어내고, 머리도 바글바글 볶은 걸 잘 빗

겨서 우리 남편이 바르는 머릿기름 같은 걸 잘 발라 가지고 쪽진 머

리처럼 보이게 뒤로 빗어 넘겼다. 그게 주효한 걸까. 운이 좋았던 걸

까. 첫날 오픈하는 날, 하루에 들어온 주문량이 오십만원 이상이었

다. 오십만원이면 남편이 교장할 때 한 달 월급이었다.

손님이 많고 장사가 잘되니 제일 먼저 할 일이 도움 준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일이었다. 한 달 안에 부부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 아이

들 옷을 다 만들어 줬다. 그 댁들하고는 두고두고 친분을 유지하면서

있었는데 규준이네는 좀 뒤에 뭔가 일이 잘못되었는지 어디론가 없어

졌다.

내가 가게를 내던 60년대 후반에는 비로도 치마 저고리가 유행이었

다. 그런데 그 비로도란 게 바느질하기가 힘든 천이다. 여차하면 천

이 울뿐더러 여간해서는 곱고 매끈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 당시 송옥

양장점이라고 유명한 양장점이 있었는데 그 비로도 옷을 잘하기로 소

문났다. 나는 그 양장점에 가서 비로도 박는 법을 좀 배우자고 해서

배웠다. 지금이야 어림도 없는 소리겠지만 그때는 마음들이 좋아서

돈을 좀 내고 배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비로도 치마 저고리에 관한

한 장안에 소문났던 내 솜씨는 송옥 양장점에서 배운 덕이 컸다.

나는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 공임을 비싸게 받을 것. 그당시 삯바

느질 공임이란 보잘 것이 없었다. 그무렵 한복집으로 이름났던 종로

주단에서 비로도 치마저고리 한 벌 공임이 8백원이었던 걸로 안다.

그런데 나는 3천원을 받았다. 그 비싼 공임은 지금까지도 사람들 구

설수에 오르내리는 걸로 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그만큼 자신도 있

었거니와 생각이 있었다. 삯바느질 정도에 머물러 있던 한복에 대한

인식을 끌어올려 디자이너로서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올라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한복도 다양한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에 맞춰 지을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일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자부심이 없었다면 한복 가게를 낸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

다. 나는 그때부터도 손님들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기보다는 손님들의

개성에 맞춰 한복을 지으려고 최대한 애써왔다. 내가 공전을 그렇게

많이 받는다고 도로 갔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다 다시 왔다.

당시 삯바느질집 주인은 그냥 ‘아줌마’, ‘아주머니’로 불렸다.

그러나 나는 내 동생이고 점원이고 손님 앞에서는 나를 ‘이 선생님

’이라 부르게 했다. ‘이 선생님, 손님 오셨어요.’ 식으로. 그랬더

니 손님들도 절로 ‘아줌마, 이 천으로 한복 한 벌 지어 주세요’가

아니라 ‘이 선생님, 이 색이 나한테 어울릴까요?’ 하는 식으로 말

투가 바뀌었다.

그렇게 공임이 비싼 데도 불구하고 그 집 바느질 잘하더라 하는 소

문이 금새 나서 우리 가게 앞에는 자가용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아이디어 하우스’가 그 한복집 이름이었다. 동생이 양장점을 하고

나는 한복 가게를 하는데, 사실 그 두 개가 다 안 되면 옷을 수선해

줘도 먹고 살 자신은 있었다. 그만큼 돈을 벌 자신이 있고, 그래서

뭐든지 일감이 들어오기만 하면 할 생각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런

데 막상 가게를 내자 동생 양장점은 자꾸 밀려 나고 내 한복가게는

매일 성황이고, 그래서 마침내는 동생이 제 일을 접어두고 내 일을

거들어 줘야 할 형편이 되었다.

석달도 안 되어 나는 옆 가게를 얻어 나갔다. 그 가게는 동생을 주

고 나는 좀더 큰 가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이리자

한복 연구실’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손님들은 꾸준히 몰려왔고, 너

무 많이 와서 걱정일 지경이었다.

가게를 냈을 때 남편은 실직 상태였다. 그런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

면 안되겠다 싶었다. 그때 우리 가게에 배상명씨가 곧잘 오셨다. 그

분께 의논을 드려 그분의 권고대로 외국어대학의 대학원을 졸업했다.

본디 전공은 법학이었지만 외대에서는 일어일문학을 했고, 다시 일본

으로 가 일본 외국어대학을 또 졸업했다. 외대 대학원을 다니면서 남

편은 상명여대에 시간 강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일본 외대를 졸업한

뒤에 상명여자대학에 교수가 되었다.

그게 한 오륙년된다. 대학원을 두 군데를 공부했으니 본인도 힘들었

고, 나도 뒷바라지하느라 힘들었다. 가게가 잘됐기 때문에 가능했을

지는 잘 모르겠다. 가게가 안되었다면 또 어떻게 해서든 남편 공부를

시켰을 것이다.

하긴 남편 공부만 시켰나, 자식은 물론이고 시댁 식구浴沮?내가

다 챙겼으니. 시집을 오니까 얼마 안 있어서 시숙이 마흔하나에 돌아

가셨다. 큰댁에 아들 셋, 딸 하나 해서 자식이 넷이었다. 또 큰시누

가 마흔둘되던 해에 남편을 여의었다. 그 집에도 자식이 넷이었다.

우리 형님이나 시누님이나 생활력이 크게 없으신 분들이라 생계며 자

식들 교육비가 큰일이었다. 집안에 바라볼 데라고는 우리집밖에 없

지, 그나마 남편은 본인이 공부한다고 나이 마흔에 대학원을 다니지,

결국 집안의 생계는 내가 맡아야 했다. 또 그 집 애들과 우리 애들을

다 내가 가르쳤다. 어쨌든 다들 고등학교까지는 공부를 가르쳐서, 공

부 잘하는 놈들은 대학 다 보냈고, 공부 못하는 놈들은 고등학교 졸

업하고 취직을 시키고 조카딸은 시집도 보냈다.

흔히들 이리자 한복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A라인 치마다. 내

가 이런 스타일의 치마를 만들게 된 것은 집에서 삯바느질을 할 때부

터다. 내 손으로 내 옷을 지어 입다 보니 이리저리 연구를 하게 되었

다. 어릴 때부터 얼마나 멋 부리기를 좋아하던 사람인가. 그런데 키

가 큰 데다 마른 체형인 나는 한복이 잘 어울리지 않고 꼭 전봇대에

옷 입혀 놓은 것처럼 축 처지곤 했다. 좀더 예뻐 보이는 방법을 찾다

보니 이 A라인식 치마를 개발하게 된 것이다.

라인 치마의 가장 큰 특징은 위는 좁고 밑은 넓게 재단하는 것이다.

치마 폭이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전통 한복이

항아리 모양으로 볼록한 데 비해 이 스타일은 허리가 날씬해 보인다.

우리 한복은 뒷품이 크고 앞품은 좀 좁아서 자꾸 앞으로 잡아 당기

면서 입어야 한다. 또 상박하후로 항아리식 재단이다. 일직선을 가지

고 주름을 잡아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거머쥐면 배가 불룩하게 나온

다. 그게 우리 전통 한복의 맵시다. 그런데 이런 스타일은 몸이 자그

마하고 예쁜 사람이 아니면 맵시가 나지 않는다. 또 점차 입식 생활

로 바뀌어 가면서 전통 한복의 맵시가 오히려 불편한 점이 많기도 했

다. 나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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