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네가 딸 낳았대.” 엄마가 둘째 외사촌 오빠네 득녀 소식을 전하신다. 그리고 덧붙이시는 말씀. “첫딸은 살림밑천이라고 해 줬어.”

그러니까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다는 거겠지. 참 나, 여전히 저 말을 쓰시네. 지겹게도 변하지 않는 우리네 ‘딸맞이’ 풍경. 슬쩍 부아가 나지만 “나는 나중에 딸 낳아야지”라고 가볍게 한 마디만 하고 만다. 그러나 곧바로 따라오는 엄마의 말씀. “딸은 낳아서 뭐하게?”

“그럼 아들은 낳아서 뭐하누?” 잠잠. 우리 집은 그나마 최소한의 생각은 있는 집인가 보다. 아버지는 머쓱한 말투로 “옛날부터 큰딸은 살림밑천이라고 했어”라는 말을 ‘그래, 딸도 좋은 거야’의 뉘앙스로 말씀하신다. 지겨움을 넘어서 뭔가 기분이 찝찔하다. 뭐지?

보통의 어른들 중 한 분이지만 가끔 놀라울 정도로 페미니스트적 통찰력을 보여주시곤 하는 어머니의 낮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밥상을 가른다. “옛말도 가만히 보면 바뀌어야 될게 많아. 옛날에 큰딸은 정말 살림밑천이었지. 공부를 가르치길 했어, 뭐 했어. 들어가는 건 없고 부려먹기만 하니 살림밑천이었지. 동생들 위해 가족 위해 희생만 했으니까.” 분개를 기본정서로 한 비꼬는 말투. 아무 생각 없이 하던 말이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열 받는 말이라는 걸 깨달으신 거다.

“왜 그렇게 나쁜 쪽으로만 생각 하냐?” 아버지가 불쾌하다는 듯 한마디 붙이시지만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는다. 지고 못사는 아버지 성격에 이런 반응이라면? 기분 나빠도 사실이니까 그렇겠지.

‘밑천’은 살림의 주인이 아니다. 살림의 주인은 밑천을 들여서 살림을 키운다. 그 주인 자리는? 아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딸은 살림밑천’이란 말은 살림을 일으킬 사람을 못 얻어 섭섭한 사람에게 밑천이라도 얻지 않았느냐고 위로하는 것이다. 그리고 딸들은 실제로 그 ‘살림밑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왔다. 개개의 가정뿐만 아니라 70년대 살인적인 착취에 시달리며 나라의 ‘살림’을 키웠던 나이 어린 여공들, 달러 벌러 기지촌으로 내몰렸던 딸들…. 그리고 그 딸들은 지금도 여전히 ‘살림밑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어른들은 내게 칭찬의 의미로 ‘큰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을 해주셨다. 나도 집안에서 ‘의미 있는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내게 기대하는 집안의 기대치는 남동생에 대한 기대치와 달랐다. ‘살림밑천’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다.

‘딸은 살림밑천’이란 말은 부모들에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태어난 딸들에겐 상처가 되기도 한다. 이미 세상은 그녀를 환영하지 않고 그녀가 살아가게 될 삶의 범위도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해져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 상처를 위로해 주는 말을 준비하지 않는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고? 그냥 평범하게 자란 딸들은 어쩌라고?

미국의 인기 시트콤 <프렌즈>에서 주인공 중 한 명인 레이첼이 딸을 임신했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리는 장면이 있다. 레이첼의 “딸이야”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서로 얼싸안고 환호하며 기뻐한다. 그 장면의 낯설음에 눈물이 나왔다.

아들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주저앉아 울어버리셨다는 친구의 시부모님 얘기를 들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여자들이 더 높은 것 아니냐고 헛소리하는 남자들은 보시게. 생명의 무게는 똑같고 누구나 다 소중하다고 말만 잘 하는 사람들도 보시게. 태어난 것이 너무 기뻐서 주저앉아 울어버리는 것과 ‘살림밑천’이라는 슬픈 말로 위로하는 것. 그 둘 사이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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