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게임서 확인한 ‘우리-남한-남자’의 동질감

남남북녀. 북한 ‘미녀’ 응원단의 가히 폭발적인 인기몰이 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났던 단어다. 한반도 남쪽에는 남자가, 북쪽에는 여자가 인물이 좋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지만 통일에 대한 상상력을 애틋하고도 낭만적으로 드러내는 단어라고 생각되기에 더욱 애용된 듯 하다.

이번 아시안게임 성화 점화자도 남남북녀의 원칙에 따라 정했다 한다. 얼마 전에 보았던 모 통일행사 포스터에도 참한 북한처녀와 자상한 남한청년의 이미지가 들어있었다. 통일을 노래하는 숱한 시들, 연극들에도 남남북녀의 이미지는 반복된다.

그런데 나는 그 단어가 어느 순간부터 싫어졌다. 며칠 전 누군가 말했다. “남남북녀가 아니라 남녀북남이었으면 그 말이 그토록 유행했을까?” 아, 바로 그거였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왜 그 단어에 막연한 거부감을 갖는지 깨닫게 됐다.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 속에서도 주체는 언제나 그렇듯 남성이다. 우리-남한-남자·그들-북한-여자의 구도 속에서 익숙해진 통일에의 상상력이란 결국 비극적인 것일 게다. ‘우리’가 그리워하고 끝내 보듬어야 하는 ‘대상’으로, 그 신비화된 여성성으로 북한이 제시되는 것이 비록 남한남자들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북한응원단 열풍 속에서 차라리 참담해진다. 그들을 ‘꽃보다 고운 내 누이여’라고 소위 진보언론이 불러줄 때 차마 꽃이 되고 싶지도 않은 나는 언니를 언니라 부르지도 못하고 입을 막아야 한다. ‘북한미녀들에게 넋 놓다가는 머릿속까지 벌개진다’는 세기의 유머에 배를 잡고 웃다가도 벌건 얼굴로 북한 미녀들의 미끈한 다리를 잡는 카메라 기자들이 떠올라 소름끼치게 된다. 그런 아저씨들의 흘낏댐을 또 한쪽에서는 통일을 향한 연정이라 열심히 포장하니 이 역시 한편의 코미디다. 이 땅에서 통일을 만드는 힘은 아저씨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건만 왜이리 노골적이신지.

북녀 열풍으로 인해 남북관계가 긍정적으로 변화할 것이며 북한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질 거라 한다. 여자를 볼거리로 생각하는 남북한 지도층 공동의 생각을 확인했으니 동질감도 돈독해졌겠지. 남남북녀의 키워드는 통일을 기원하는 꽃바람으로 ‘우리-남한-남자’들 사이에서 계속될 것이며 결국 여성들은 그 대단한 민족의식 속에서 지워지고 대상화되는 자신의 존재를 보게 될 것이다. “여자들도 인간입니다. 당신들의 눈을 위해 당신들의 판타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라는 말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나.

홍문 보미 red-thy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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