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일탈에 대한 뻔한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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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소비문화 시대. 코드명 불륜. 서점, 비디오 대여점, 인터넷 사이트, 화장실 벽.

어디에서건 과잉으로 제공되는 물품공략에 당신은 어쩌면 짜증이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의 짜증은 오히려 다른 곳에서 연유한다. 과잉으로 제공되는 이 불륜 상품들이 도무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모든 상품들이 본질적으로 그러하듯 순간적인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다름과 차이의 안개가 걷히고 나면 ‘뻔한, 너무나 뻔한’ 동일한 이야기가 줄줄이 늘어져 있지 않는가. 탈 포드주의 시대에 맞지 않는, 거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 속에서 대량생산된 듯한 저 불륜 상품들. 그런데도 중년여성, 중년남성의 ‘일탈적’ 행위로서 여전히 불륜이 누리는 특권적 위치는 심지어 뻔뻔스럽기조차 하다. 생성의 기운을 다 잡아먹는 일상의 저 무의미한 전투에 ‘노우’를 외치는 형식이,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채 엉겨붙은 분노와 불안의 타르를 뱉어내는 해방의 방식이 왜 항상 불륜이어야 할까. 그렇다면 영화 <낙타(들)>이 강조하는 ‘무거운 짐’은 또 뭘까.

삼십 대 후반의 한 여자와 사십 대 초반의 한 남자의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의 궤도이탈을 다루고 있는 <낙타(들)>은 영화의 제작방식과 내용을 반성적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환영적 요소를 가능한 지워버리려 애쓴다.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관객은 현실에서보다 더 늦게 흘러가는 어떤 상황 속 장면 때문에 자꾸 시계를 보게 된다. 그리고 표정이 풍부한 얼굴이 아닌 뒤통수를, 감정과 내면이 묻어나는 소위 ‘주인공’의 목소리가 아닌 등장인물의 소음 같은 말을 계속 보고 들어야 한다. 이토록 ‘깨어있는 상태’에서 그렇다면 관객은 무엇을 성찰해야 한다는 것일까, 어떤 환영적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일까.(혹시라도 몰래 카메라에 찍히면 안되니까) 친구의 차를 빌어 타고 거주지를 벗어나 적당히 먼 곳으로 가기, 횟집과 노래방을 거치며 어둠이 깊어지기를 기다리기, S자로 포개놓은 다리를 풀지도 못한 채 거북한 자세로 섹스를 시작하기, 섹스 후 비빔냉면을 먹기, 다음날 모텔을 나와 헤어지기 전에 한번 더 식당에서 무언가를 먹기. 이 일련의 ‘재미없고, 의미없는’ 불륜 행보를 따라가면서 관객은 한국사회에서 중년의 삶에 대한, 중년의 삶에서의 일탈에 대한 상상력이 얼마나 무채색으로 건조하게 말라버렸는지, 얼마나 서푼짜리 매뉴얼에 기대고 있는지 지루한 몸을 배배 꼬면서 확인해야 한다. 일상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일탈은 처음부터 너무 왜소하고, 그 안에 깃들여 있다고 추정되는 욕망은 너무 밋밋하다. 영화 속의 두 사람은 숙제처럼 불륜을 하고 있다. 전혀 일탈이나 전복의 힘을 지니지 못하는, 그렇다 거의 제도처럼 부과된, 중년이면 꼭 해야 되는 숙제. (중년이면 불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 저 허다한 재현물들!)

이 영화를 보면서 당신이 어떤 존재론적 슬픔을 느낀다면, 그래서 ‘그래, 인생은 어차피 출구 없는 사막일 뿐이야. 이것이 평생 견뎌야 할 내 생의 짐이야’라는 사이비 기도문을 읊조린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장난삼아 설치해 놓은 나쁜 의도(복수형의 <낙타들>)에 당신이 속아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의욕에 가득 차서 ‘궤도이탈’에 대한 다양한 매뉴얼을 구상하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손톱만큼의 위로나 쾌락도 주지 않는 이 영화가 숨겨 놓은 좋은 의도(단수형의 <낙타>)를 발견한 셈이다. 때로 ‘당신만을 위한 신나는, 특별한 불륜’이라는 제목의 매뉴얼도 보너스로 끼워주는 재치도 발휘하면서 말이다.

김영옥/한국여성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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