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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가고 불안만 남았다.”

조선희씨는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첫 데뷔작을 내놓고 난 뒤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기자가 기사를 쓰는 게 사실 사이에 난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면 소설 쓰기란 열려진 지평 위로 무궤도차를 타고 누비는 기분이지요.” 기자에겐 사실에 대한 가치판단의 개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소설가는 말 그대로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채 순간순간 행로변경을 한다는 점에서 역동적일 수도 긴장감에 말려 들어갈 수도 있다는 말일 게다.

소설을 쓰기 위해 잘 나가던 영화주간지 <씨네 21> 편집장 일을 그만두고 들어앉은 지 2년 여. 첫 소설이 나오고 한달 반 남짓 흐른 지난 19일 작가를 마포 작업실에서 마주 했다. 열정으로 가득찬 이삼십대를 보내고 사십대의 문턱에 들어선 작가의 심정 역시 불안만 남았을까.

“20대 후반에 소설가로 데뷔했다면 열정에 못 이겨 내 안에 갇혀 있는 글 밖에 못썼을 거에요. 40줄의 문턱을 넘어 글을 쓰니 사회와도 나와도 충분히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됐어요. 자신에 매몰되지 않는 눈을 가지게 됐달까.”

어느 정도 독자 반응을 짚어볼 수 있는 시기인데 작가의 심정이 궁금하다. 1권은 벤처캐피털과 인수 합병을 둘러싸고 회사 창립 멤버인 동창생들과 갈등을 그린‘나(영준)’의 얘기다. 2권은 시점을 달리해 여자 정신과의사 ‘인호’의 1인칭 서술형이다. 1권 후반부가 좀 밋밋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작가가 받는다.“여성 독자들이 아무래도 그렇게 말해요. 2권에 좀 더 섬세한 여성심리가 녹아 들어가 있으니까. 그저 아무런 평가없이 침묵하고 있는 다수 독자들의 심중이 궁금하죠.”

지금 이곳의 얘기다

“지금, 이곳(now and here)의 얘기를 쓰고 싶었어요. 우리들 속에서 출발하는 얘기 말이에요. 처음부터 판타지엔 관심없었고…균형을 찾아가는 구조다 보니 당연히 극적인 사건은 없을 수 밖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전투구하는 남성, 그 남성 또는 사회를 바라보는 여자 정신과 의사, 이들의 얘기가 가지를 벌려가며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얼개지요.”

소설의 화두는 주인공 영준이 찾아가는 이탈리아 마을 눌라치타(아무 곳에도 없는 마을이란 뜻), 즉 유토피아를 향한 주인공들의 끊임없는 갈구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절어 유토피아를 잃어버린 영준, 저주스런 가족을 부정하고 극단의 자유를 통해 안티테제를 이루는 인호.

“사실 유토피아를 집단적으로 건설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이죠. 제 젊은 날 역시 이상향을 찾기 위한 끊임없는 몸부림이었어요. 하지만 나이 마흔에 도달한 결론은‘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현 세대는 유토피아에 대한 동기도 분명하고 열정도 있지만 그게 세대를 넘어 상속되지는 않으니까. 소비에트도 3세대만에 몰락했구요. 인간의 모든 시도들이 3세대안에 실패로 돌아갔죠.”

삶의 순간(瞬間)이 유토피아

“삶의 매 순간마다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면 유토피아는 없는 거죠. 영준이 눌라치타를 찾아가지만 딴판으로 변해버린 마을을 발견하는 것처럼. 글쎄 친구 하나(최보은씨)가 내 소설을 보고 눌라치타 가는 비행기표를 끊어야겠다고 그게 어디냐고 전화를 걸어왔더라구요. 실재하지 않는 곳이었는데.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어요.(웃음)”

영준이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려는 캐릭터라면 인호는 극단의 자유주의를 추구하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선회한다. “소녀시절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가족환경을 경험하고 가족 이데올로기 안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 인물이죠. 결국엔 현실에 다리를 딛고 이상과의 절충점을 찾아요. 그 절충점이 바로 현실 속에 존재하는 눌라치타에요.”

작가가 정신의 가계(家系)를 유토피아로 설정한 점이 특이하다. 인호가 열일곱살에 상담을 받으며 삶의 모델로 삼았던 정신과 의사 강선생, 그리고 가정폭력에서 도망쳐 데리고 나온 자신의 환자 수혜. 인호를 매개로 세사람이 꼭 스무 살씩 차이가 난다. 이는 주인공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가는 정반합의 논리로 설명했다.

“인호는 정신과 의사지만 정작 자신의 트라우마(trauma: 충격으로 인한 상처, 외상)는 극복 못하는 상태에요. 자신이 경험한 가족 테제의 극단으로 치달아 거침없는 연애, 독신을 추구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유의미한 가족을 만들며 승화돼 자신만의 눌라치타를 찾게 되지요.”

여성성도 자기만의 방식대로 구현된다고 느껴 인호를 통해 바람직한 여성성을 구현하고 싶었다는 그는 소설 곳곳에서 자신의 이력을 오버랩시킨다.

“나도 젊었을 땐 남자들처럼 똑같이 하려고 했어요. 술도 똑같이 마시고 개차반처럼(!) 굴고…육탄공격으로 부딪히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남자들과 동등한‘특권적’지위는 부여되지 않았죠.”작가의 신참 기자 시절 경험 역시 작가의 여성성 개념에 녹아들어갔나보다.

“20대까진‘내가 항상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흔이 되니 저기 멀리 철책이 쳐져 있고 내가 거기까지만 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아 있는 날을 가늠하는 만큼 더 현실적으로 된 거지요. 비현실적 상념으로 들어찬 젊은 날을 지나서, 현실을 마주보는 그야말로‘현실적인’인간이 됐죠. 지금 ‘그 곳’을 발견하지 않으면 철책 너머엔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역설적인 건 죽음을 항상 결부시키는 태도에서 오히려 순간마다 유토피아를 보게 된다는 거죠.” 작품 중‘행복은 삶의 불행 사이 잠깐 찾아오는 손님’이라는 말은 저간에 그런 뜻을 담고 있나보다. 작가의 말 한마디가 삶의 순간 속에서 번뜩이며 튀어나오는 칼처럼 날카롭다.

불안을 담은 열정

“프로이트는 서구 근대인의 특징을 열정과 불안으로 규정했어요. 소설 플롯과 딱 맞아떨어지는 말이기에 주저없이 제목으로 택했지요”

카뮈는 범죄자가 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그도 언젠가 엄마 얘기를 써서 부채를 갚고 싶었다고 말했다.

“위트있고 인문학적 자질도 엿보이는 분이었는데 무학에다 병적인 시집살이…당신 말년엔 가슴에서 뭔가 뜨거운 게 치밀어 오른다구 하셨어요. 여성에게 엄마는 항상 기본적인 역할모델이잖아요. 나 역시 인호처럼 엄마를 극복하려는 한편으로 엄마에 대한 향수가 유토피아적인 부분으로 남아있어요. 엄마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니 이젠 엄마에 대해 쓸 수 있겠구나 싶어요.”

나르시시즘이 손을 움직여 초고를 쓰게 했다는 작가는 원고 수정부터 교정, 마케팅 등 책이 나오기까지 모두 처음이라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다. 마흔이 넘어 공부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열정일 터. 아니, 이제 막 3쇄에 돌입한 작가의 작품은 불혹을 넘어 낳은 것이기에 열정 그 이상이다.

이박 재연 기자revival@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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