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또 한번 희망의 싹을 짓밟아야 하는가. ‘제2의 반민특위’라 부르면서도 제발 반민특위의 전철만은 밟지 않기를 바랐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이 사실상 끝나게 됐다는 뉴스가 나온다. 결국 또 하나의 역사 청산은 용두사미로 끝나게 됐다. 아무리 한시적 기구로 출발했다지만 시간에 쫓겨 접수된 사안의 절반은 결론도 못내고 그냥 남겨둔 채.

지난 16일엔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이 위원회를 존속시키라고 요구했지만 이제까지 정부와 국회가 보여온 태도로만 봐서는 가능성이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임기말의 정부는 비록 대통령 직속기구이지만 당초 의원입법으로 발족됐다는 이유로 활동시한 연장이나 조사권한 강화 등을 국회에만 미뤄왔다. 국회는 국회대로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서로 책임 떠밀기에만 급급할 뿐 조사권한 강화는 고사하고 활동시한 연장 자체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법사위 검토조차 없이 안건이 묵살돼 버렸다.

민주당 이창복 의원,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 등 일부 의원들이 당론과는 무관하게 활동시한 연장과 조사권한 강화를 내용으로 한 의원입법 발의를 했다지만 관련 특별법 개정에 소홀한 법사위에서 검토조차 제대로 될 공산이 없다고도 한다.

애당초 이 위원회가 발족될 당시에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희생자들의 사망 이유를 명확히 하자는 기대였고 그 기대에 맞춰 서울대 최종길 교수 사건, 한총련 투쟁국장 김준배씨 사건, 인혁당 사건 등의 내막이 밝혀지는 성과를 올렸다. 동의대 사건처럼 사실확인이 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이 빚어지는 사안도 발생했지만 오랫동안 시중에 소문으로만 떠돌던 여러 진실을 정부기구가 확인해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사회에는 희망이 자라는 듯 보였다.

그러나 최근 진실이 밝혀진 허원근 일병의 사망 조작사건과 같이 민주화 운동과 직접적 관련은 없으나 사회 민주화 과정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군의문사 사건이 대거 위원회로 접수되면서 처리해야 할 사안은 당초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일손 부족과 정보기관, 군 등의 비협조로 조사 장애가 겹쳐 위원회는 처리해야 할 사안을 잔뜩 쌓아놓기만 한 채 시한에 떠밀려 주저앉을 상황이 됐다. 사건을 접수시켜놓고 조사를 기다리던 유가족들은 애당초 기대하지 않은 것만도 못한 기막힌 처지가 돼버렸다.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적 숙제들을 후손들 앞으로 떠밀어 놓기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가깝게는 해방 이후 역사만 봐도 친일문제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해 을사오적의 자손들이 정부에 회수된 조상들의 재산을 되돌려달라고 소송을 제기하는 사태가 발생하는가 하면 오늘날까지도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의 가계가 도마위에 오르고 논란 공방이 오가는 현실이다.

그나마 군사독재 시절, 그 엄혹하던 유신시절과 국보위 시절 등을 겪으면서 의문 속에 싸늘한 시신으로 화한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 국가의 부름을 받고 복무 중이던 군에서 죽었으나 번번이 ‘자살’이라는 통고 한 장으로 사실확인도 제대로 못한 채 부모들 가슴에만 묻혀버린 젊은이들의 죽은 원인이나마 제대로 파헤쳐져 역사가 바로서기를 기대했던 국민들은 시쳇말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는 실망감을 버릴 수 없게 됐다.

이 일이 나아가 “우리 민족은 어쩔 수 없다”는 체념으로 화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지난 역사의 오욕을 제대로 평가하고 청산할 것은 청산하는 민족이 될 때 이 민족 구성원 모두에게는 민족의 미래와 관련한 희망이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언제쯤이나’가 아니라 바로 지금 그 희망의 싹을 틔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이대로 고사시켜서는 안된다. 더 이상 한시적 기구로 방치해서도 안된다. 모든 의문사들을 한점 의혹없이 조사하고 해결해낼 때까지 존속시켜야 한다. 거기 더해 명목뿐인 조사권을 준사법적 권한으로 강화해 조사에 비협조적인 ‘힘있는’ 기관들의 오만방자함까지 심판토록 해야 한다.

더 이상 우리를 희망없는 민족이 되게 내버려둬서는 안된다. 희망의 싹을 틔울 때는 바로 ‘지금’이다.

편집주간shh@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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